설 극장의 결투… 설경구 ‘첩자 색출’ 對 황정민 ‘인질 구출’

박돈규 기자 2023. 1. 16.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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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개봉 설 흥행 대작 2편

설 연휴 ‘아바타: 물의 길’의 독주에 맞설 극장가의 결투가 펼쳐진다. 현재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아바타: 물의 길’은 1000만 관객 돌파 초읽기에 들어간 상태. 대항마가 될 한국 영화 두 편이 18일 나란히 개봉한다. 설경구·이하늬 주연의 항일 투쟁을 다룬 ‘유령’과 황정민·현빈 주연의 인질 구출전을 다룬 ‘교섭’이다.

18일 나란히 개봉하는 영화 '유령'(왼쪽)과 '교섭' 포스터 /뉴시스

◇영화 ‘유령’

‘유령에게 고함. 작전이 시작된다. 성공하기 전에는 멈추면 안 된다.’

영화 ‘유령’(감독 이해영)은 긴박한 지령과 함께 시작한다. 1933년 경성. 유령으로 불리는 항일 조직 스파이가 신임 총독을 노리고 있다. 경호대장 카이토(박해수)는 조선총독부에서 암약하는 유령을 색출하기 위해 용의자 5명에게 가짜 암호 전문을 보낸다. 함정이다.

통신과 감독관 쥰지(설경구), 암호 전문 기록 담당 박차경(이하늬), 정무총감 직속 비서 유리코(박소담), 암호 해독 담당 천은호 계장(서현우) 등은 벼랑 끝 외딴 호텔에 갇힌다.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거나 다른 사람을 고발해야 살아나올 수 있다. 총을 겨누며 카이토는 윽박지른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네가 아는 유령은 누구냐?”

영화 ‘유령’에서 총독부 경호대장 카이토(박해수)가 통신과 감독관 쥰지(설경구)에게 총을 겨누고 있다. 스파이 색출 작전과 총독 암살 작전이 동시에 펼쳐진다. /CJ ENM

중국 추리소설이 원작인 이 영화는 이들이 서로를 향한 의심과 경계를 뚫고 탈출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과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전반부는 차가운 밀실 추리극이지만 후반부는 뜨거운 액션물로 온도가 상승한다. ‘독전’(2018)으로 기억되는 이해영 감독은 화려한 색감, 웅장한 음악과 함께 90년 전 경성을 낯설게 보여준다.

배우들은 믿음을 배신하지 않는다. 설경구의 표정에는 조선인의 피가 흐르는 쥰지의 콤플렉스와 출세욕이 묻어난다. 에너지를 발산하기보다 안으로 눌러담은 이하늬의 절제된 연기, 어떤 상황에도 기죽지 않는 박소담의 단단한 얼굴을 만날 수 있다. 일본어 대사를 100% 소화한 박해수의 카이토는 악랄하고, 서현우는 ‘헤어질 결심’의 철썩이에 이어 또 한 번 존재감을 보여준다.

액션은 ‘몸을 쓰는 감정 연기’다. 총독 부임 축하 행사장에서 벌어지는 액션 시퀀스는 불꽃놀이처럼 화려하다. 태풍의 눈처럼 고요해지는 순간도 있다. 여배우들의 맹활약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이야기는 불굴의 항일 투쟁인데 연출은 화려한 홍콩 누아르에 가깝다. 골격과 거죽의 이 부조화가 몰입을 방해한다. 더 묵직하게 들려야 할 대사들이 허공으로 휘발되는 이유다. 133분, 15세 관람 가.

◇영화 ‘교섭’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인 선교단 20여 명이 이슬람 무장 조직 탈레반에 납치되는 사태가 일어난다.탈레반이 내건 조건은 한국군 철수와 투옥된 조직원들의 석방. 설상가상으로 남은 시간은 24시간이 전부다.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외교부 실장 정재호(황정민)와 국정원 요원 박대식(현빈)이 현장 투입되지만, 막상 이들은 교섭 방식을 놓고 사사건건 부딪친다.

‘교섭’은 2007년 분당 샘물교회 선교단 피랍 사건의 실화에 바탕한 영화. “어느 시선에서 바라보냐에 따라서 민감한 소재인 건 사실”이라는 임순례 감독의 말처럼, 외교적·종교적으로 첨예하게 입장이 엇갈릴 수도 있는 사안이다. 하지만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과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임순례 감독은 결코 우회하는 법 없이 종착점까지 우직하게 직진하는 정공법을 펼쳐 보인다. 시사적 주제라는 점에서는 황우석 논문 조작 사건을 다뤘던 전작 ‘제보자’와 닮았다.

영화 ‘교섭’에서 한국 외교부 실장 ‘정재호’(황정민)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피랍된 선교단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교섭’에는 영화적 미덕이 적지 않다. 우선 관객보다 먼저 흥분하거나 정의감과 상업성을 적당히 뒤섞는 한국 영화의 고질적인 ‘분노 상업주의’와 과감하게 작별했다. 서늘한 외교전과 뜨거운 액션의 배합 비율도 적절하다. 거칠고 황량한 사막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현빈의 오토바이·차량 액션은 ‘공조’ 시리즈 이후 한층 업그레이드됐다. “난 이 동네가 좋아요. 하늘과 땅 사이에 나밖에 없는 이 느낌이…”라는 그의 대사도 울림이 길다. 현지 촬영은 요르단에서 마쳤다.

물론 약점도 있다. 온 가족이 극장가를 찾는 설 연휴라는 시기적 특성을 감안하면 논쟁적 주제는 흥행의 부담 요소가 될 수 있다. 한국 정부가 인질 석방을 위해서 테러범에게 거액을 지급한 사건을 결과적으로 미화했다는 비판도 충분히 가능하다. 여성 감독의 영화인데도 여성들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도 흥미로운 역설이다. 1996년 장편 데뷔작 ‘세 친구’부터 남성적 세계의 빛과 그늘을 즐겨 다뤘던 감독 특유의 스타일이 투영된 결과다.

하지만 서너 개의 단점보다 한 가지 장점이 크게 돋보이는 영화가 있다. ‘교섭’이 그런 경우다. 영화에서 시종 두드러지는 건 주어진 직분에 최선을 다하려는 인물들의 사투(死鬪)다. 한국·아프가니스탄 당국자들은 물론, 인질 교섭에 혼선을 끼치는 방송사 PD에게도 나름의 동기와 논리를 부여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섭’은 무엇보다 직업 정신에 대한 이야기다. 그동안 한국 상업 영화에서 공란으로 남아 있던 대목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108분, 12세 관람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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