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보일러보다 따뜻한 마음
지금 사는 강원도 지역은 12월이면 주변 강이 얼고 사흘이 멀다하고 눈이 내린다. 취업하며 처음 왔을 땐 참 좋고 신기했다. 20년 가까이 산 고향 부산에선 눈 구경할 날이 열 손가락에 꼽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환상과 감성은 잠깐. 이젠 눈 내리면 출근길과 초등학생 아들 둘의 하굣길부터 걱정되고, 직장 앞마당을 쓸 생각에 골이 아프며, 월말에 날아올 가스 난방비 고지서가 무섭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의 겨울도 눈만 적었지 늘 현실이 무서웠다. 우리 집은 아빠 회사의 부도와 동생의 암 투병으로 당장 내일 먹을 쌀 잔량을 걱정한 날이 많았다. 그런 형편에 다섯 식구가 마음 놓고 보일러 트는 건 사치였다. 엄마는 아침마다 부엌 들통에 달그락, 달그락 세숫물 끓이는 소리로 우리 잠을 깨웠고, 난방비 저렴한 가스난로와 전기장판을 돌렸다. 그럼에도 외풍 심한 우리 집 공기는 늘 찼다. 내복에 두꺼운 옷, 이불까지 꽁꽁 싸매도 코가 시렸고, 추위에 움츠린 어깨가 늘 결렸다.
한번은 친구네 놀러가 겨울에도 반소매 입은 걸 봤다. 부러웠다. 부잣집 아이 같아서. 그 친구는 신학기 때면 다른 반 친구들과 새로 산 유명 브랜드의 옷과 가방을 서로 자랑하기 바빴다. 그걸 본 나도 시장을 몇 시간씩 뒤져 비슷한 짝퉁 가방을 샀고, 등교 때 슬그머니 상표를 손으로 가려 멨다. 그게 창피했고,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
몸서리치게 춥던 그 시절을 기억하는 난 이제 조금만 추워도 보일러를 튼다. 반면 친정집은 지금도 자주 찬기가 돈다. 칠십 넘은 부모님이 추위에 떨었을 생각에 “궁상떨지 말고 제발 보일러 좀 트시라”며 매번 화를 쏟게 된다. 그러다 “아빠랑 단둘이 사는데 돈 아깝다”는 엄마 말에 깨닫는다. 내가 화내는 건 사실은 부모님을 살뜰히 헤아리지 못한 나 자신임을. 보일러를 틀어 몸은 따뜻하지만 늘 찬물로 설거지하던 어린 시절 엄마가 떠올라 죄책감을 느끼고 있음을….
이제 부모가 된 나는, 철부지 시절 부모를 원망했던 아이보다 그에게 맘껏 사 줄 수 없던 부모 마음이 더 속상함을 알게 된다. 뒤늦게나마 감사했다고, 이젠 마음껏 따뜻하게 지내셨으면 좋겠다고 전하고 싶다. 비록 가난으로 추웠지만, 그 시절 자식에겐 최선을 다하셨던 부모님의 마음은 누구보다 따뜻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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