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희의 아이러니] 알고리듬으로부터의 자유

기자 2023. 1. 16.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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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니라 플랫폼 회사의
알고리듬이야말로
생각의 진정한 주체라고
마침내 플랫폼의 알고리듬이
우리의 무의식이 된 것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1941년 네 가지 기본적 자유, 즉 ‘언론의 자유’ ‘신앙의 자유’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역설했다. 한국의 경우 상대적으로 문제가 덜한 ‘신앙의 자유’를 제외한다면, 어떤 자유를 넣을 수 있을까. 요즘 돌아가는 사정을 보고 있노라면, ‘알고리듬으로부터의 자유’를 넣는 게 합당해 보인다.

조광희 변호사

알고리듬은 “입력된 자료를 토대로 원하는 출력을 유도하는 규칙의 집합”으로 정의된다. 지금 전 지구적으로 골치 아픈 문제가 된 알고리듬은 거대 플랫폼 기업이 개인의 성향과 취향에 맞추어 결과를 산출할 때 사용하는 알고리듬이다. 그 알고리듬은 기업이 시장에서 살아남고 발전하기 위해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수단을 넘어서서, 민주주의를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다.

브라질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의 지지자 수천명이 며칠 전 대통령궁·의회·대법원에 난입하는 폭력사태가 있었다. 뉴욕타임스는 관련 기사에 이런 제목을 붙였다. “무엇이 브라질 수도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초래했는가? 집단 망상이다.” 우리는 그런 상식 밖의 언행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단순히 정신 나간 사람들로 치부하지 말고 그 원인을 탐구해야 한다. 만일 개표에 부정이 있었다면, 그런 과격한 의사표현도 인간적으로는 이해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표면화된 집단 망상도 플랫폼의 알고리듬과 깊은 연관이 있다.

진실이란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분명하다 해도 사회에 수용되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다. 자연과학적 진리조차 인간적 편견에 크게 의존한다는 것은 토머스 쿤이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제시하면서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과학적 진리가 아닌 인문사회적 진리는 말할 것도 없고, 현실정치로 들어가면 혼란은 더 심각하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개혁의 길을 걷다가 고초를 받는 사람인가, 하마터면 대통령이 될 뻔한 범죄자인가? 검찰의 전방위 수사는 불가피한 것인가, 정적에 대한 저열한 표적수사일 뿐인가. 이때 진실에 근접한 관점을 가지는 것은 의외로 어렵다. 가뜩이나 어려운데, 진영화된 언론은 그것을 더 어렵게 한다. 보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알고리듬은 견해들을 양극화시키며, 마침내 브라질 사태에서처럼 집단 망상으로 이어진다. 이 사회에서 견해의 양극화는 물론 가짜뉴스로 인한 공동체 에너지의 소진, 근거 없는 명예훼손과 모욕으로 인한 인격살인의 폐해는 오래전에 도를 넘었다. 새로운 매체환경에 맞게 사회의 의사소통체계를 재구성하는 작업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사람 사이의 연결을 추구하던 ‘소셜네트워크’는 어느 순간 콘텐츠의 초고속도로인 ‘소셜미디어’가 되었다. 방송이 된 ‘소셜미디어’에서는 감정적이고 선동적일수록 콘텐츠가 빠르게 확산된다. 대중을 감정적으로 격동시키고 정치적으로 선동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그를 먹여 살릴 신도들을 쉽게 구할 수 있다. 주장의 진위를 불문하고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고 떼돈을 모을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플랫폼의 알고리듬은 사람들에게 다른 견해를 상상하거나 균형을 잡을 기회를 주는 게 아니라, 자기 신념의 폐쇄회로에 가둔다. 어떤 의견을 가지게 되면, 그 의견과 유사한 의견을 계속 폭식하면서 자기 확신의 감옥에 수감되는 것이다. 레거시 미디어는 견해의 양극화를 중화시키기는커녕 그 흐름에 편승하고 있다. 정치적 생존에 급급하고, 개인적 인기에 목마른 정치인은 그 도도한 흐름에 맞서기는커녕 한 줌 이익이라도 볼까 기웃거리며, 그러한 ‘소셜미디어’에 휘둘린다.

요사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인공지능에 맞추어 법률과 제도를 마련하자는 논의도 활발하다. 산업과 기술을 진흥하면서도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규제가 동시에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유럽연합은 물론 여러 나라들은 인공지능이 ‘윤리적이어야 한다’ ‘인간중심적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어떤 연산결과의 근거가 되는 ‘알고리듬의 내용이 확인되어야 한다’는 원칙도 제시하고 있다. 현실을 집어 삼킨 플랫폼에도 그러한 원칙들이 뒤늦었지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데카르트의 명제를 비틀어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고 설파한 바 있다. 그는 ‘무의식’을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이제 이렇게 해석될 수도 있다. 내가 아니라 플랫폼 회사의 알고리듬이야말로 생각의 진정한 주체라고. 마침내 플랫폼의 알고리듬이 우리의 무의식이 된 것이다.

조광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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