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독가 문재인 “책은 민주주의를 의미합니다”…그의 ‘인생책’은?
‘평산마을책방’ 내는 문 전 대통령
47년째 출판 외길을 걸어온 김언호 한길사 대표가 지난 연말 평산마을을 찾아 문재인 전 대통령을 만났다. 오로지 ‘책’을 주제로 한 3시간의 인터뷰를 3회로 나눠 싣는다.
김언호 한길사 대표
문재인 전 대통령은 지난해 5월10일 5년의 임기를 마치고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평산마을로 귀향했다. 책 읽는 대통령이 국민의 이웃으로 내려왔다. 나는 책 읽는 전임 대통령에게 우리가 펴낸 책들을 갖다 드리고 싶었다. 그의 서재도 보고 싶었다. 그의 독서편력을 듣고 싶었다.
국토의 산하가 붉게 물드는 지난해 겨울날 오후였다. 1400년의 고찰 통도사가 자리 잡은 영축산 자락의 평산마을, 50여 가구 100여 주민이 문재인 전 대통령과 이웃하고 있다.
대통령은 텃밭에 메밀을 키우고 있다. “고교 때 읽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느낌이 강렬해서 강원도 봉평까지 메밀꽃을 보러 갔었는데, 우리 집에도 메밀꽃이 피었습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에도 여러 책들의 독후감을 널리 알렸다. 국민들과 함께 책 읽고 생각해보자는 것이었다. 퇴임 후에도 권독(勸讀)을 이어갔다. 한국역사연구회 회원 70여명이 10년에 걸쳐 공동으로 집필한 <시민의 한국사>를 추천했다. “국정교과서 파동의 성찰 위에서 국가주의적 해석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역사를 서술한, 시민을 위한 역사서”라고 했다. 이어 천현우의 <쇳밥일지>, 여성 우주비행사 켈리 제라디가 쓴 <우주시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정지아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김훈의 소설 <하얼빈>을 추천했다.
“저의 책 추천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출판계에 도움이 된다니 매우 기쁩니다. 제가 오래전부터 책을 추천해온 이유이고 목적입니다. 하지만 베스트셀러는 저의 추천이 아니라 좋은 책이 만드는 것이지요. 저자와 출판사가 노력해낸 산물입니다.”
문 전 대통령의 평산마을 서재는 과거 임기 때의 국정 철학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 근현대사와 민족운동사를 다룬 역사서들, 근현대 문학사를 빛낸 소설들을 통해 대통령의 취향과 문제의식을 살펴볼 수 있다. 재임 시절의 정책을 담아낸 책들도 있다. 지난 1960년대부터 한국사회가 구현해낸 민주화운동의 실천과 이론을 증언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그의 부하 김재규에 의해 시해되는 10・26정변 열하루 전인 1979년 10월15일 출간된 <해방전후사의 인식> 초판본이 내 눈에 들어왔다. <혼불>과 <중국인 이야기>, <일제하 한국농민운동사>와 <슬픈 열대>도 있다.
<열국지>와 <삼국지>, <징비록>, <종의 기원>과 <코스모스>가 보인다. 평전과 전기, 자서전이 많다. <김대중 자서전>,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오바마의 <담대한 희망>, <체 게바라 평전>, <심산 김창숙 평전>, <문익환 평전>, <녹두 전봉준 평전>, <조영래 평전>이 그것들이다.
<미국민중사>, <영국노동계급의 형성>, <진보와 빈곤>도 있다. <식물의 사생활>과 <야생초 편지>와 <우리 나무도감>이 문 전 대통령의 독서 영역이 참 다채롭다는 걸 보여준다.
그는 우리 문학사를 빛내는 소설들을 섭렵하고 있다. <토지>, <광장>, <순이 삼촌>, <관촌수필>, <장길산>,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무기의 그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백정>, <까마귀>, <한라산의 노을>, <남한산성>, <빨치산의 딸>이 그 작품들이다. 여기에 더해 <고요한 돈강>과 <개미> 등이 문 전 대통령이 애독하는 문학세계의 목록이다.
문 전 대통령의 독서철학
나는 문 전 대통령의 독서편력과 책의 철학을 본격적으로 듣고 싶었다. 귀향 철학과 고향에서 하고자 하는 구상도 듣고 싶었다.
―재임 때와 달리 퇴임 후에는 독서도 좀 더 자유로우시겠습니다.
“부담 없는 책 읽기를 하게 됩니다. 퇴임 후에 제가 읽은 책들 가운데 일부를 추천도 하고 있습니다. 너무 두껍고 전문적인 책들을 권하기는 쉽지 않지요. 재임 중에는 아무래도 일과 연결되어 제가 좋아하는 소설 같은 건 못 읽고 국정에 참고가 될 만한 책들을 읽었습니다.”
―늘 책을 손에 들고 계시는군요.
“그런 편입니다. 일종의 활자 중독이라고나 할까요. 우리는 인쇄 세대잖습니까. 늘 책과 같이 있어야 마음이 편안해지지요. 여행을 갈 때도 책 몇 권을 들고 갑니다. 낮잠을 잘 때도 책을 베고 자면 더 편하다고나 할까요, 하하.”
―최근에 끌리는 주제를 말씀해주시지요.
“앞으로 세계가 어디로 갈 것인가를 통찰하는 책들, 4차 산업혁명이 우리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코로나와 새로운 감염병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우리 모두가 걱정하는 기후위기, 이런 주제의 책들을 재임 때부터 읽고 있습니다.”
―지구온난화 문제, 지구의 운명을 생각이 있는 지도자들은 고민하겠지요. 세계의 출판사들과 연구자들도 이런 문제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다자정상회의 같은 데를 가보면, 공식 회의에는 4차 산업혁명과 코로나 문제, 기후위기 문제가 반드시 포함됩니다. 유럽 쪽은 이에 대한 인식이 굉장한 수준에 올라 있습니다. 지구를 지키고 인류의 생존을 위한 우리의 당연한 의무이기도 하지만, 뒤처지면 앞으로 유럽 쪽에서 만들어지는 탄소세라든지, 무역장벽에 부딪히게 됩니다. 이에 대처하지 못하면 우리 경제가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재임 중에 가장 고민한 과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역시 세계인들과 함께 겪어야 하는 코로나 위기였습니다. 코로나는 우리의 문제이지만 동시에 세계인의 문제로, 향후 인류의 삶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에 관한 책들을 읽으면서 고민했습니다. 코로나 이후를 어떻게 인식하고 대처할 것인지를 탐구하려 했습니다. <코로나 사피엔스>와 <오늘부터의 세계>를 읽고 여러 분들에게 추천도 했습니다.”
미지에 대한 호기심
―이제 과학은 물론이고 인문·사회과학의 지향과 논점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책이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호기심이지요.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호기심, 미지의 세계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지요. 이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독서가 아닐까 합니다. 이 호기심으로 자기 세계가 확장되지요. 인생관과 세계관,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곧 책 읽는 행위가 아닌가 합니다.”
―책 읽는 정치세력의 정치와 책 읽지 않는 정치세력의 정치가 다를 것입니다.
“우리 국가 사회가 민주화되는 과정을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친일, 해방 이후의 독재와 권위주의, 이 권위주의를 뒷받침하는 분단체제, 이 권위주의에서 형성된 기득권 세력의 생각, 이런 현실에 대한 비판 없이 우리 국가 사회의 민주화는 불가능했던 것이지요. 책을 읽는 분들이 진정으로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앞장섰지요. 책은 민주주의를 의미합니다. 책은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권독’ 하는 문 전 대통령
―다른 나라도 이렇게 직접 책을 ‘권독’ 한 사례가 있나요?
“과거 케네디 전 대통령이 휴가 때 읽은 책을 소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바마 전 대통령도 그런 노력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출판계가 어려움을 겪으니까 출판계를 응원하는 의미도 있고요. 저는 대통령 재임 이전부터 에스엔에스(SNS)를 이용해 이런저런 책을 추천해왔습니다.”
―제가 <세계서점기행> 취재 차 워싱턴과 뉴욕을 방문했을 때 그곳 서점인들을 만났습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이나 오바마 전 대통령이 읽고 싶어 하는 책이라면서 구입해가기도 하고, 때로는 전 대통령이 곧 서점에 들르니 이런저런 책을 준비해달라고 연락해온다고 했어요. 재임 중엔 어떻게 책들을 구하셨습니까?
“언론이나 에스엔에스에 소개되는 북리뷰를 보면서 책을 구입해달라고 참모들에게 부탁하곤 했습니다. 지인들이 보내오기도 하고 참모들이 추천해주기도 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민주화운동은 책과 함께 구현되었지요. 특히 1970~80년대에 우리 사회에 활짝 꽃피었던 인문·사회과학을 중심으로 한 출판문화운동, 그 책들을 매개하는 사회과학 서점들의 독서운동을 통해 비판적인 문제의식을 키우게 되었지요. 민주화운동을 견인해내는 젊은 세대들의 출판운동과 독서운동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지 않나 합니다.”
―출판 현장에서 책을 만들면서 저는 실감합니다. 1980년대는 위대한 책의 시대라고요. 책을 쓰고, 책을 만들고, 책을 읽는, 그 지적·이론적 성찰과 실천이 한국사회를 변화시키는 역량이 아니었나 합니다. 새롭게 인식되고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그 시대에 집중해서 출간된 인문·사회과학 책들을 우리는 한껏 읽을 수 있었지요. 그 본격적인 시작이 <해방전후사의 인식>(한길사)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이후에 우리 역사를 새로운 문제의식으로 연구하는 작업들이 진행되고 책으로 출간되기 시작했지요. 비판적 지성을 담은 사회과학책과 더불어서 말이지요.”
1980년대 출판운동은 민주화운동의 역량
―<해방전후사의 인식>는 1979년부터 1989년까지 10년에 걸쳐 총 여섯권이 출간되었는데 ‘(전) 대통령 독자’를 만나 말씀을 듣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출판인으로서 정말 큰 행운입니다.
“70년대와 80년대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불타던 시대였지요. 해직 언론인들과 민주화운동에 나섰던 젊은이들이 출판계로 많이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그런 분들이 새로운 출판운동·독서운동을 불러일으켰지요. 그 운동이 민주화운동, 6월항쟁으로 나아갔지요. 그 시절의 출판운동·독서운동은 그 자체로 민주화운동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독서에 대해 말씀 듣고 싶습니다. 초·중·고교를 부산에서 다니셨지요. 그래도 부산은 큰 도시니까 책을 구하긴 어렵지 않으셨겠네요.
“어린 시절, 다들 가난하던 시절이라 책을 읽고 싶어도 구하기가 힘들었지요. 제가 제일 먼저 읽은 책은 우리 누나의 교과서였습니다. 저보다 3년 위인데, 국어나 사회 교과서에 재미있는 글들이 많이 실려 있었잖습니까. 우선 제 교과서 얼른 다 읽고, 누나 책을 보는 겁니다. 집에 책이 없으니 그렇게라도 읽었고 재미있었습니다. 늘 책에 대한 갈증이 있었지요.”
―저는 책 없는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의 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학교 주변에 책방이 많아 놀랐습니다. 그해 5・16 쿠데타가 일어났고, 탱크가 시내 곳곳을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탱크들이 무섭기도 해서 피해 들어간 곳이 보수동 책방골목이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책들의 풍경이 신비로웠습니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저에겐 책의 고향입니다.
“저도 갔지요. 거기 가서 이 책 저 책 보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고등학생이 되면서 참고서를 구입해야 하는데, 새 참고서는 비싸니까 헌책방에 가면 싸게 살 수 있었지요. 그땐 광복동 야시장 노점에도 헌책들이 많이 나와 있었습니다. 때로는 새 책도 있었지요. 약간 흠이 있거나 파손되어 출판사가 폐기한 것을 아주 저렴하게 팔았어요. 읽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대하소설 같은 걸 정가의 몇 분의 일로 팔았습니다. 골라잡아 천원 식으로도 팔았습니다. <삼국지> <열국지> 같은 대하소설을 사서 읽었습니다. 제가 사용한 참고서를 그 헌책방에 팔기도 했습니다. 얼마 안 되지만 더 보태서 새 학기 참고서를 구입하기도 했지요.”
시국사범들과 함께 책 읽은 셈
―부산 학생들에겐 보수동 책방골목의 존재는 큰 행운이었습니다. 제가 다닌 고등학교는 서면에 있었는데, 서면 일대엔 책방들이 많았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100여개의 서점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사상계>를 밑줄 그어가면서 읽었습니다.
“저는 <사상계> 세대는 아닌데, 학교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어서 보기도 했습니다. 1972년 대학에 들어가면서 리영희 선생의 글을 만났지요.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고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한 권의 책입니다. 리영희 선생의 또 한 권의 책 <우상과 이성>도 읽었습니다. 계간지 <창작과비평>을 읽었습니다.”
―1975년 3월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의 기자·피디들이 자유언론운동으로 대거 해직되었는데, 편집국장 송건호 선생이 이에 항의해 사퇴합니다. 저도 그때 해직되면서 출판을 시작하게 됩니다. 당시 문화공보부는 <민족경제론>을 학생들이 많이 읽으니까 출간 석 달이 지나서 판금시켰습니다.
“박현채 선생의 책들과 변형윤 선생의 책들을 읽었습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도 읽게 됩니다.”
―부산 시절 인권변호사 하시면서 어떤 책들을 읽으셨습니까?
“그 시절 사회과학책들을 주로 읽었습니다. 1980년대는 학생들을 비롯한 이른바 시국사범들이 양산되던 시절이었지요. 비판적인 문제의식의 책을 소지하거나 읽었다고 구금하거나 구속했지요. 책 읽고 토론했다고 수사받고 구속되는 시대였습니다. 이들을 변론하자면 문제 되는 책들을 읽어봐야 했지요. 시국사범들과 함께 책 읽은 셈이었습니다.”
―1970년대 말부터 뜻있는 사람들이 양서협동조합운동을 펼쳤습니다. 부산에서는 1977년에 시작했지요. 1978년 서울에서 양서조합할 때 저도 참여했습니다. 양서조합운동은 그 후 대구·마산·광주·울산·수원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변호사이던 때 양서협동조합에 참여했지요. 책들이 시민의식을 고양시켜준다는 생각을 했고, 의미 있는 책들을 읽는 방법으로 양서조합을 만들었습니다. 회원들에게 책을 싸게 공급하고 토론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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