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은 하늘”…밥심으로 투쟁하던 이들이 기억하는 ‘밥묵차’
경북 성주 소성리·청와대 등
사회적 약자 있는 곳이 무대
농성장에 집밥으로 힘 보태
작년 말 췌장암 판정에 입원
“언니, 30년은 더 해야지”
노동자 인권운동가들 ‘응원’
“여기 계신 분들 못해도 한 번씩은 유희 언니 밥 다 먹어봤죠?”
“네!”
지난 14일 오후 2시 인천 부평구 민주노총 인천지부 지하 강당에 모인 80여명이 함성을 쏟아냈다. 모두가 한 사람을 바라봤다. ‘토요일은 밥이 좋아’ 응원회의 주인공, 유희씨(64)였다.
이날 모인 노동자와 인권운동가들은 “집회 현장 어디를 가도 유씨가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대한민국에서 투쟁하는 사람치고 유희 동지 밥 안 먹어본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 밥 먹고 컸고, 복직했습니다.” 한진중공업의 마지막 해고노동자 김진숙씨도 유씨가 건넨 밥을 기억하는 응원 영상을 보내왔다.
유씨는 투쟁 현장 어디든 달려가는 ‘십시일반 음식연대 밥묵차’(밥묵차)의 대표이다. 20여년간 전국 각지 집회 현장에 밥을 나누러 다녔다. 돈은 받지 않았다. 경북 성주 소성리, LG 트윈타워, 청와대와 법원 등 사회적 약자들이 힘겹게 싸우는 모든 곳이 그의 무대였다. 벽 한쪽에 붙어 있던 밥묵차의 달력 사진이 그 흔적이었다. 투쟁 장소로 빽빽한 달력은 유씨가 보태온 밥심이 얼마나 많은 곳에, 얼마나 많은 이에게 닿았는지 보여준다. 이날 응원회는 유씨의 밥을 먹고 힘을 냈던 이들이 유씨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자리였다. 지난해 말 췌장암 판정을 받은 유씨의 두 손을 맞잡으며 “누님 얼른 나으셔야지” “언니 우리 30년은 같이 더 해야지”라고 응원했다.
사람들은 35년 전부터 한결같이 남을 챙기던 유씨를 기억했다. 1988년 청계천에서 공구 노점을 하던 유씨는 폭력적 단속에 맞서 노점상 투쟁과 빈민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전국노점상연합회에서 연을 맺은 조덕휘씨(64)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던 유씨의 모습을 회상했다. 조씨는 “서울 중앙시장 뒷골목에서 영업하던 아주머니들을 중구청에서 너무 심하게 단속했다. 이때 유희가 말 한마디로 용역 깡패를 딱 정리해서 놀랐다”고 했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밥차를 한다고 해서 쉬운 일이 아니라 오래 못 가겠다 싶었는데 지금껏 하는 걸 보고 또 놀랐다”고 했다.
전국노점상연합회 수석부의장으로 활동한 유씨는 1995년부터 집회 현장에서 밥을 짓기 시작했다.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 열사가 분신한 해였다. 박 열사로부터 직접 유언을 들은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유씨는 투쟁하던 장애인들을 위해 왕십리 시장에서 들통과 솥을 가져다 국밥을 끓였다.
유씨의 밥은 ‘집밥’이다. 몇인분이든 유씨가 집에서 직접 짓고, 손수 나른다. 100인분일 때는 코란도, 300인분까지는 에쿠스, 1000인분이 필요할 때는 1t 화물차를 불러 날랐다. 빈민운동을 함께한 박원주씨와 노인 요양원 봉사를 같이 한 김기수씨 같은 동료들이 밥묵차 멤버가 돼 도왔다.
자가용으로 감당키 어려운 양이 됐을 때 밥묵차 멤버들이 ‘새로 밥차를 장만하자’며 후원을 받았다. 2016년 작은 푸드트럭 ‘밥묵차’가 탄생했다. 8명이던 밥묵차 멤버도 현재 17명으로 늘었다. 지금은 투병으로 쉬고 있지만, 활동을 멈추기 전까지 밥과 밥솥은 여전히 유씨 몫이었다.
밥묵차는 추운 농성장에서 김밥 한 줄이나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이들에게 큰 힘이 됐다. 고등어 무조림, 제육볶음 같은 메인 메뉴에 김치, 계란말이 등 반찬이 나오는 집밥으로 하루 두 끼를 해결할 수 있었다. 최성원 밥묵차 활동가는 “밥차가 오면 밝아지는 사람들 표정이 저희에겐 가장 큰 찬사”라며 “그리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고된 것을 잊는다”고 했다.
밥묵차의 밥은 허기를 채우는 것 이상의 일을 했다. 참석자들은 언제 끝날지 모를 긴 싸움에 지쳐 있을 때 먹었던 유씨의 집밥을 기억했다. 허지희 세종호텔 정리해고 노동자는 “추울 때 시래기국 같은 따뜻한 국물을 주시면 일단 몸이 녹았다. 그럴 때 힘을 받고, 위로를 받고, 응원을 받았다”고 했다.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은 2012년 서울 대한문 시민분향소를 설치하면서 유씨와 만났다. 김 지부장은 “누님은 노래도 잘하시고, 표정도 밝으시고 굽힘이 없다”면서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됐다”고 했다.
김송이 기자 songy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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