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시문학 위해 헌신하고 나룻배처럼 훌연 가셨구려”
뭐가 그렇게 급했는가, 이렇게 빨리 가다니! 지난 1월13일 한국 시문학계의 큰 별이 떨어졌다. 김재홍 경희대 명예교수. 향년 75.
그의 업적은 너무나 많다. 잠시도 쉬지 않고 연구와 출판 그리고 갖가지 문학 행사를 진행해왔기 때문이다. 그는 1969년 문학평론가로 등단한 이래 경희대 교수를 지내면서 시문학 분야에서 독보적 성과를 이뤘다. ‘현대 시인 연구’ 등 관련 저서만 해도 40권이 넘는다. 2020년 20권 중 10권이 먼저 나온 ‘김재홍 문학전집’만 보아도 그의 학문적 업적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문단에서 김재홍이라는 이름을 높인 것은 계간지 <시와 시학>의 발행이다. 생명·사랑·자유의 정신을 내걸고 1991년 창간한 이래 국내 최장수 계간 시잡지라는 기록을 세우고 있다. 이 잡지를 통해 배출된 시인만 수백명에 이른다. 그래서 ‘시와시학’ 출신 시인의 면면만 보아도 한국 시단의 한 갈래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이다.
나 역시 김 교수의 지도 아래 시인의 이름을 얻었다. 내 미술사 연구의 길잡이였던 경주의 토함산 석굴암을 주제로 삼아 20여년 전 장편 시집을 썼다. 하지만 시집으로 기본이 되어 있는지 자신할 수 없었다. 탈고하고도 그냥 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우연히 윤효 시인의 인도로 ‘김재홍 시학교실’의 수강생이 되었다. 매주 시 한 편씩을 써서 발표하고 토론하는 시 공부 모임, 김 교수는 종합 정리를 해주면서 모임을 이끌어갔다. 시 공부나 그림 공부나 마찬가지였다. 그 경험을 살려 나는 미대 강의에서 시 공부 형식으로 그림 공부를 시켰다. 학습효과가 너무 좋았다. 3년 이상 시 공부를 하다 보니 습작 시도 제법 쌓였다. 2008년 무산 조오현 스님과 나태주 시인의 심사로 <시와 시학>에서 등단하는 행운을 안았다. 김 교수는 졸시집 <노을씨, 안녕!>의 해설을 써주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시와시학 동인모임의 회장을 지낸 인연으로 동인들과 함께했던 지역 답사나 문학 행사는 참으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김 교수는 만해 한용운 연구로 1호 박사학위를 받은 ‘만해학 연구의 권위자’로도 유명하다. 그는 1998년부터 오현 스님을 모시고 해마다 만해축전을 진행했다. 1996년 제정한 국내 최고 수준의 ‘만해대상’ 시상제도를 비롯해 다양한 문학 행사로 백담사 만해마을은 축제의 마당이 되었다. 김 교수는 만해학술원을 설립하고 만해학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면서 현대시박물관도 설립했다. 평생 수집한 희귀시집을 비롯해 시문학 관련 자료를 공개했다. 다만 만해 연구가로서 만해의 <님의 침묵> 초간본을 구하지 못해 아쉬워했다. 마침 나에게 그 희귀본이 있어 기꺼이 김 교수에게 선물했다. 그때 기뻐하던 그의 모습, 정말 잊을 수 없다. 김 교수는 2013년 무려 1만6천여점의 자료를 고향인 천안 백석대에 기증해 산사현대시100년관을 열게 했다.
김 교수는 진정 시문학을 목숨처럼 사랑했다. 잡지의 구호처럼, `하늘엔 별, 땅엔 꽃, 사람에겐 시', 이를 실천하고자 평생을 바쳤다. 별과 꽃과 시. 더 이상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가 즐겨 쓰던 `좌우명' 같은 말이 있다. 바로 ‘선연선과’(善緣善果), 좋은 인연은 좋은 결과를 준다는 것. 하기야 좋은 씨가 좋은 열매를 얻게 하지 않겠는가. 세상이 하도 수상하니 시정신의 고귀함이 새삼 그리워지고 있다. 김 교수는 행사장이나 술자리 같은 데서 시 낭송도 즐겨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그가 읊던 만해의 `님의 침묵'은 노래처럼 들렸다. 특히 나는 그의 시 낭송 가운데 만해의 `나룻배와 행인'을 좋아해 나의 애송시 1번이 되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참으로 감동적인 작품이다. 이렇게 쉬운 표현으로 깊은 사상을 담다니, 역시 만해다운 작품이다. 자비, 사랑, 헌신과 같은 단어를 떠오르게 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당신은 조국이어도 좋고, 민족이나 사회여도 좋다. 아니, 연인이어도 좋다. 희생정신은 아무리 상찬해도 부족함이 없다.
김재홍. 그는 `나룻배와 행인'의 나룻배처럼 인생을 살다가 간 ‘시문학의 대가’였다. 이제 어디에 가서 `나룻배'와 같은 인물을 만날 수 있을까. 허망하기 그지없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윤범모/국립현대미술관 관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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