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 통화정책 무력화시키는 금감원의 新관치 [따로노는 금리정책]
은행 이자장사에 인하요구 크지만
통화정책 경로 망가져 부작용 심각
한국은행(한은)이 기준금리를 올리면 당연히 예금과 대출 금리도 뒤따라 오르게 된다. 시장이 이렇게 반응해야만 중앙은행으로선 기준금리 조정으로 목표한 정책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요즘 국내 금융시장은 이런 모습과는 영 딴판이다. 한은이 기준금리를 올렸는데도 여·수신 금리는 별로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낮아지는 양상이 나타난다. 금융당국이 은행권의 금리 인상을 강력 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막대한 이자 수익을 내고 있는 시중은행이 사회적 의무를 다할 필요가 있고, 대출 금리 상승에 따른 취약 계층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대출 금리 인상을 억제해야 한다는 게 금융당국 입장이지만 그렇다면 굳이 기준금리를 인상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비판도 나온다.
◇금융당국, 기준금리 인상에도 "대출금리 올릴 요인 적다"
15일 금융권 등에 따르면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 등 금융당국은 한은 금융통화위원회가 지난 13일 연 3.25%인 기준금리를 3.50%로 올리자 은행들의 대출 금리 추가 인상 여부를 밀착 모니터링하고 있다.
특히 이복현 금감원장은 13일 당일에 "은행 등에서는 가산금리 조정에 어느 정도 재량이 있다"며 "과도한 대출금리 상승으로 인한 가계와 기업의 부담이 큰 점에 대해 개별 은행이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원장의 이 같은 발언은 은행들에게 노골적으로 금리 인상 자제를 주문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 원장은 "시장이 잘 작동하는 상황에서 금융당국이 개입하는 것은 극히 부적절하지만 시장에 과도한 쏠림이 있는 경우 개입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금융당국의 서슬 퍼런 경고에 은행들도 눈치를 보며 대출금리 인상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이번 주에도 한은의 기준금리 인상과 반대로 은행권 대출 금리는 오히려 0.3%포인트 안팎 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16일 은행연합회에서 발표하는 작년 12월 기준 코픽스(COFIX·자금조달비용지수)가 지난달 예금 금리 하락을 반영해 낮아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예금 금리 또한 금융당국의 시장 개입으로 기준금리가 올랐는데도 오히려 낮아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11월 연 5%를 넘어섰던 예금 금리는 최근 4%대로 내려왔고, 일부 은행 상품의 경우 3%대 후반까지 하락한 상태다. 한 시중은행 자체 추산 결과 예금 금리 하락 등으로 코픽스가 약 0.15%포인트 인하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은행권 변동금리는 주로 코픽스에 가산 금리를 더하는 방식으로 산정된다. 코픽스 하락이 대출금리 하락으로 이어지는 셈이다.
주택담보대출 혼합형(고정) 금리와 신용대출 금리도 0.3%포인트 안팎 인하될 전망이다. 주담대 혼합형과 신용대출의 지표 금리인 은행채 5년물과 1년물의 금리가 최근 1주일새 각 0.394%포인트 내렸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주요 은행들은 대출금리 인하를 발표하며 금융당국의 눈밖에 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은행들은 취약계층 이자 부담 완화 등을 금리 인하의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금융당국의 경고는 물론 정치권 등의 비판 여론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천문학적 이자수익, 은행만 배불려"
금융당국과 정치권이 대출금리 인하를 강제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시중은행들의 막대한 이자 수익이다. KB국민·신한·하나·우리 등 4대 금융그룹은 지난해 이자 수익으로만 65조원 이상을 벌어들인 것으로 추산된다. 3고(고금리·고물가·고환율) 현상으로 대내외 경제여건이 악화해 서민 고통이 가중되고 있는데, 은행들은 이자수익으로 수십조원대 이익을 실현하며 성과급 잔치를 벌인다는 비판이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지난 12일 비상대책위원회에서 "예금과 대출이자 차이, 예대이율 차이가 커 서민들의 많은 어려움이 있다"며 "금융당국은 위법부당한 일이 없는지 철저히 감독해주고 시중은행들은 가뜩이나 어려운 현실에서 서민들이 예대이율 차이로 고통을 겪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말했다.
◇"금감원 신관치, 통화정책 무력화"
문제는 금융당국과 정치권에 금융시장에 직접 개입하면서 통화정책을 무력화시킬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한은의 기준금리 조정은 이른 바 '통화정책 전달 경로'(금리 변경→총수요 변화→실물경기 조절)를 통해 실물경제(거시경제)에 반영된다. 금리를 올리면 총수요가 억제돼 물가를 잡을 수 있고, 금리를 낮추면 총수요를 부추겨 경기를 부양할 수 있다. 금리 변경에 따른 총수요 변화는 각 경제주체들이 한은의 기준금리 조정 효과에 대한 컨센서스가 전제돼야 한다. 요즘처럼 한은이 기준금리를 바꿔도 예금과 대출 금리는 거꾸로 간다면 금리조정 효과가 없어지는 것이다.통화당국이 기준금리를 올릴 이유를 없게 만드는 셈이다. '돈의 가격'인 금리(이자율)는 특히 자유시장경제에서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가장 중요한 가격체계 중 하나다.
게다가 금융당국의 인위적인 금리 개입이 계속되면 오히려 서민층을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은행들이 금리 인하를 통해 예대마진을 줄이다보면 부실화될 우려가 큰 대출을 먼저 회수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날 수 있다. 부실화 위험이 큰 대출일수록 '디폴트 프리미엄'이 많이 붙으면서 예대마진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결국 금리 인하 움직임으로 서민이나 유동성 위기에 처한 기업들의 만기 연장이 거부될 가능성이 커지는 셈이다.
법정최고금리 인하가 서민층을 '대출한파'로 내몰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금융당국은 서민대출 활성화를 위해 연 20%에 묶인 법정 최고금리를 시장금리에 연동시키는 방식도 검토했지만 국회 반대 기류가 뚜렷해 도입 논의를 당분간 보류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 정부가 들어선 이후 금융당국의 금리 개입으로 인한 시장 왜곡은 이미 수차례 발생하기도 했다. 예금금리가 대표적이다. 출범 초기인 지난해 7월에는 예금금리 인상을 독려하다가 11월 자금경색 사태에서 시중자금을 빨아들인다는 지적이 나오자 예금금리 인상 자제로 돌아섰다. 결국 지난해 11월 연 5%를 넘어섰던 은행권 정기예금 금리는 두달여만에 3%대로 내려와 있다. 그 사이 한은은 두 차례나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중 예금금리가 뒷걸음질친 셈이다. 반면 대출금리 상승세는 멈추지 않으면서 은행들 배만 불렸다는 비판이 나왔다.
석병훈 이화여대 교수(경제학)는 "한국은행의 통화정책의 독립성을 무시하는 듯한 금융당국의 금리 개입은 대단히 부적절하다"면서 "금융당국의 금리 개입은 기준금리를 올리면 예금·대출 금리도 따라 올라가면서 물가가 잡히는 메커니즘을 완전히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강길홍기자 slize@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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