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과 비판이 실종된 대한변협 회장선거

한겨레 2023. 1. 15.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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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대한변호사협회. <한겨레> 자료사진

[시론] 민경한 | 변호사·전 대한변협 인권위원장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한다.” 변호사법 제1조 1항 내용이다. 대한변호사협회 회칙(제2조)도 “기본적 인권 옹호와 민주적 기본질서 확립”을 주요 설립 목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역대 대한변협 회장들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변협은 대표적인 인권 옹호 단체”라고 강조해왔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딴판이다.

16일 치러지는 차기 변협 회장 선거에 3명의 후보가 출마해 치열한 선거운동을 벌여왔다. 선거운동 기간 이들 세 후보는 전국 변협 회원 3만여명에게 세 차례에 걸쳐 자신의 공약을 담은 홍보물을 배송했다. 후보마다 20~30개씩 세 후보의 70~80개 공약 중 인권에 관한 공약은 단 한개도 없다.인권이란 말조차 한 후보가 단 한번 언급하고 지나간 게 전부다.

대신 선거 홍보물에는 직역(변호사 업무영역)의 수호와 창출, 회원 소득 증대, 회원 복지 확충과 안전 보장, 회원 권익 신장, 사설 플랫폼 대응 등으로 넘쳐 났다. 심지어 회원 소득을 두 배로 늘려준다거나 싱글 변호사 회원을 위한 매칭 사업을 지원한다는 공약도 있었다. 최근 변호사 수가 크게 늘었고, 유사 직역의 직역 침탈, 법조 환경 변화 등 여러 요인으로 변호사들이 매우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다. 이런 문제를 논의하고 개선하는 공약도 필요하다. 하지만 70년 전통의 공신력 있는 최대 인권 옹호 단체 수장을 뽑는데, 국민의 인권과 관련된 공약도 몇 가지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사실 새삼스럽지도 않다. 6년 전, 두 명이 출마한 변협 회장 선거 때도 수십개씩 내놓은 공약 가운데 인권 공약은 물론, 인권이라는 단어가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왜 그럴까. 변호사들이 보수적인데다 생존에 급급해 인권에는 관심이 없고, 공약에서 인권을 강조하면 오히려 득표에 불리해 인권 공약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변협은 변호사들이 모인 직역 단체다. 하지만 다른 직역 단체들과는 달리, 변협 회장은 법률에 따라 대법관과 검찰총장, 특별검사의 추천권을 행사하는 등 공익적 기능을 행사한다. 과거 삼성 비자금에 면죄부를 준 조준웅 특검이나 김진욱 현 초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도 변협 회장 추천으로 임명될 수 있었다. 이렇듯 사회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리건만, 세 후보는 인권 공약 하나 못 넣고 직역 수호와 소득 증대에만 매몰된 채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다.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한 후보가 현 집행부의 무능과 비리를 비판하는 홍보물을 만들자 변협 선관위에서 그 후보 홍보물에 두 쪽에 걸쳐 실린 비판 내용을 삭제하고 배포했다는 점이다. 야당 대선 후보가 현 대통령을 비판할 수 있듯이, 변협 회장 후보가 현 집행부를 비판하는 건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변협 선관위는 해당 후보가 법원으로부터 가처분 결정을 받자 뒤늦게 삭제한 내용을 추가로 회원들에게 보내는 촌극을 벌였다. 법원은 가처분 결정문에서 해당 후보자가 지적한 내용은 협회 성격이나 회원 구성에 비춰 볼 때 회원들의 공통된 관심사이거나 공적 이해관계에 속한 사항으로, 후보자가 충분히 문제를 제기할 수 있으며, 대외적으로 변호사나 변협의 명예와 품위를 손상하는 표현이라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상호 비방, 흑색선전, 폭력 시비, 고소·고발이 난무한 변협 회장 선거판은 철저하게 그들만의 리그가 됐다. 전자투표로 하는 기존 중앙선관위 시스템 대신 투표장을 찾아 종이투표를 해야 해 투표율이 크게 낮아질 수밖에 없고, 결선투표마저 없앴기 때문이다. 이런 속에서 불법 여론조사와 외부 세력 개입 의혹 등 정치권에서도 상상하기 힘든 수준의 진흙탕 싸움이 벌어졌다. 중립적이고 공정해야 할 현 집행부 임원들이 특정 후보를 위한 선거운동을 한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솔직히 변호사라는 사실이 창피할 지경이다. 변협을 변호사들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법정단체가 아니라, 원하는 이들만 가입하는 임의단체화하는 방안을 모색했으면 한다. 인권을 얘기하기는커녕 상식을 뛰어넘은 행태를 보인 세 후보 모두 변협 회장으로서 자격이 없다고 본다. 누가 당선되더라도 당선 소감이나 이후 각종 행사에서 ‘인권 옹호’란 말은 사용하지 않길 바란다. 인권이란 상시적, 보편적인 것이지 필요에 따라 이용하는 게 아니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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