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철 칼럼] 가능성의 정치

한겨레 2023. 1. 15.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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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철 칼럼]새해를 맞으며,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민주주의의 약점이 드러나는 현재,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미시적 토대를 다시 쌓을 때가 왔다. 정치의 질을 떨어뜨려 정치참여를 제한하려는 전략에 빠지지 말고, 다수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품격의 정치’를 보여줄 때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브리핑룸에서 2023년 신년사를 발표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김연철 | 전 통일부 장관·인제대 교수

‘거대한 폭풍우 속에 선원이 없는 배여’. 14세기 조국의 위기를 보고 단테가 한 말이 떠오르는 새해다.

다양한 기관에서 발표한 분야별 2023년 전망을 보면, 대체로 어둡다. 한반도의 안보 정세는 하루가 다르게 ‘충돌의 길’로 나아가고, 세계 경제도 한국 경제도 비관적이며, 전염병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고, 기후위기 같은 시대적 과제는 해결에서 더욱 멀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은 곧 사라질 황혼의 빛에 갇혀 있다.

현재의 위기는 우리가 겪었던 과거의 위기와 다르다. 세계적인 차원에서 정치와 경제 질서가 변화하는 ‘전환기’이고, 정치·경제·환경·문화 전 영역의 변화가 동시에 일어나서 ‘복합적’이며, 위기를 극복할 ‘지도부가 없다’. 마키아벨리는 운명의 여신을 험악한 강에 비유했다. 제방이 없는 쪽을 덮친다는 뜻이다. 국가마다 대응에 따라 세계적인 위기의 피해는 다를 수 있고,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는데, 과연 우리는 어떤 제방을 쌓고 있는가? 남은 것은 정쟁뿐이다.

전환은 장기적이고 구조적이기 때문에, 제방을 쌓는 일은 시간이 걸리고 다수의 지혜가 필요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정치다. 인간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는 희망이고, 희망을 실현하는 과정이 정치다. 정치의 핵심인 민주주의는 ‘단기적 약점과 장기적 장점 사이의 긴장’을 특징으로 한다. 현재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가 약점을 드러내고 있다. 최근 미국 하원의장 선거를 가로막았던 공화당의 극우파나 브라질의 반정부 시위대는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코로나 백신을 음모로 여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혐오와 차별이 만연한가?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색깔론이 판치고, 자식을 잃은 부모를 조롱하고, 법의 공정성이 사라지고, 가짜뉴스가 넘친다. 세계적으로 불평등과 양극화를 토대로 ‘불만의 표출’이 민주주의의 약점을 파고들고 있다. 폴란드, 헝가리, 이탈리아, 스웨덴의 극우파 정부는 반이민과 인종주의를 내세우고, 극단적인 작은 정부를 주장한다. 히틀러 정부에서 선전을 담당했던 괴벨스의 “민주주의는 자신을 파괴하는 수단을 적에게 주었다”는 말을 실감한다.

유럽에서 극우파 정부의 등장은 ‘불만의 결집’만큼, 투표율 감소라는 ‘정치의 실종’이 만들어낸 결과다. 경제적 여건은 불리하고, 재정의 역할은 줄었고, 실업은 늘어나는 상황에서 극우파는 정치의 질을 떨어뜨려 유권자의 기권을 유도했다. 경제위기와 민주주의의 약점이 결합해 탄생한 파시즘이 100여년 만에 부활의 날갯짓을 하고 있다. 결코 가볍게 보기 어려운 현실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약점이 많지만 질기고, 오류를 수정하는 힘이 있다. 라틴아메리카는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무장 게릴라 출신인 콜롬비아 구스타보 페트로 대통령은 무장 반군과의 평화협상을 다시 시작했다. 페트로 정부가 내세우는 평화의 정치는 콜롬비아의 오래된 희망이다. 칠레의 가브리엘 보리치 정부는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되고 헌법 내용 수정을 위한 절차를 진행 중이지만, 시대교체에 관한 공감은 유효하다. 브라질의 룰라 정부도 극우파의 난동에도 불구하고, 환경 정치를 위한 전진을 시작했다. 라틴아메리카 좌파 정부들이 기대와 현실의 격차를 좁힐지는 미지수다. 기대에서 실망으로 다시 바뀌고 보수로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칠레의 새로운 정치처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함께 참여’한다면, 가능성을 만들 수 있다.

새해를 맞으며,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민주주의의 약점이 드러나는 현재,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미시적 토대를 다시 쌓을 때가 왔다. 정치의 질을 떨어뜨려 정치참여를 제한하려는 전략에 빠지지 말고, 다수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품격의 정치’를 보여줄 때다.

그동안 장기적인 과제를 단기적으로 접근하고, 정부가 바뀔 때마다 뒤집다 보니 아무것도 쌓인 것이 없다. 임기 내에, 어쩌면 우리 생애에 실현이 어려워도, 지금 시작해야 할 시대적 과제가 얼마나 많은가? 휴전 70년을 맞이하는 올해, 전쟁이 아니라 항구적인 평화체제로의 전환을 어떻게 할지, 저출산고령화 대책이나, 기후위기와 에너지 전환 등.

정책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왜 사회적 의제화에 실패했는지 돌아볼 때다. 시대를 교체하겠다는 진정성과 정책의 일관성이 있어야 국민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정치는 희망의 증거이고, 가능성의 예술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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