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은의 유리창 너머] 에로스 대신 헤라클라스의 시대
[이주은의 유리창 너머] 이주은 | 미술사학자·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남녀 상관없이 잘 단련된 근육을 가진 모습을 보면 부럽다. 저렇게 되기까지 저 사람이 꾸준히 시간을 투자한 것에 대단하다고 느끼고, 매일 힘겨운 땀을 쏟아부은 것에 존경심도 품게 된다. 마음으로는 성실과 인내에 감동한 것인데, 눈으로는 아름답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말해지는 아름다움에도 단련의 개념이 깃들어 있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몸을 최대한으로 단련하여 스스로의 가능성을 시험해보아야 한다. 생각 없이 살면서 나이만 먹어가는 것은 창피한 일이다”라고 제자들에게 설교하기도 했다. 신체를 늘 건강하게 유지하고 운동능력을 키우도록 단련하는 일은 고대 그리스 시민의 의무였다. 잘 가꾼 몸매는 보기에도 좋을 뿐 아니라, 뛰어나고 참된 가치를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했다.
이런 복합적인 미의 개념에 잘 들어맞는 신화 속 인물은 헤라클레스일 것이다. 헤라클레스는 힘도 세고, 몸도 날쌔고, 싸움의 기술도 뛰어났다. 정신력도 대단해 아무리 힘들어도 쉽게 포기하는 일이 없었고, 잠시 유혹에 흔들리기는 해도 방향을 잃지 않고 늘 쾌락보다는 미덕의 길을 택했다. 연애에는 소질이 없었지만, 그는 신의 초능력을 빌리지 않고 사람의 능력으로만 해낼 수 있는 12가지 최고로 어려운 과제를 모두 완수해냈다.
그런데 그리스신화 문화권에서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자는 헤라클레스가 아니라, 의외로 단련과는 거리가 먼 아프로디테다. 하늘의 신 우라노스가 아들에게 거세당하여 그 잘린 생식기가 바다에 떨어지자 거품이 일어났고 거기에서 아프로디테가 탄생했다. 금방 사라져 버릴 거품이 미의 본성이라니 좀 실망스럽지 않은가.
아프로디테가 자신의 분신처럼 아끼는 아들은 에로스이다. 헤라클레스를 비롯해 그리스신화에 출연하는 대부분 신과 영웅은 제우스의 아들이지만 에로스는 별종이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고, 오직 모계인 아프로디테와의 관계만 강조되는 에로스는 아프로디테의 명령에 따르고 그녀를 항상 동반하는 상징물처럼 이해되는 자이다. 아버지의 존재가 무시된다는 것은 아버지의 세계를 구축한 기성 질서가 에로스에게는 적용되지 않음을 암시한다.
이탈리아의 바로크 화가 카라바조(1571~1610)가 그린 <모든 것을 정복하는 사랑의 신>을 보자. 우릴 향하고 있는 이 장난꾸러기 어린이가 바로 에로스다. 그가 손에 쥔 화살은 논리를 마비시키는 특성이 있어, 그것에 맞으면 좋든 싫든 오직 애욕에만 충실해진다. 화살의 충동적인 성격으로 인해 에로스는 언제나 미성숙한 아이의 이미지로 나온다.
그림의 바닥에 놓여있는 물건들은 세상을 다스리는 규범과 관련된 것들이다. 우선 갑옷은 무사들이 입는 옷으로 힘을 뜻하고, 악기와 악보는 조화로운 삶을, 직각자는 정확한 비율과 법칙을 말한다. 이 물건들은 모두 이 ‘어린이’의 발치에 있다. 힘, 조화, 법칙 같은 것은 욕망에 맹목적으로 휘둘리게 하는 에로스의 화살에 비하면 우습다는 것이다.
‘사랑이 모든 것을 정복한다’는 그림의 제목은 고대 로마시대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쓴 시에서 따온 구절이다. 사람은 사랑에 빠지면 힘으로 억지스레 굴복시키지 않아도 자기감정에 스스로 포획된다. 그러니 전혀 무장하지 않은 이 발가숭이 아이야말로 세상 모든 것의 정복자가 아니겠는가.
위대한 승리자를 슬하에 두고 있기에 아프로디테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자 아름다움 자체라는 예찬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방이 천사처럼 눈부시고 혹은 영웅처럼 멋있어 보인다. ‘제 눈의 안경’ 또는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라는 말은 그럴 때 쓰지 않던가. 이성적인 판단을 무력화시키고, 정신적으로 미숙한 상태에 머물게 하는 사랑의 감정은, 설령 거품일지언정 아름다움의 본질과 맞닿아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요즘은 사랑의 특권을 누리기는커녕 그 필요성마저 모르겠다는 젊은이들이 주위에 많다. 사랑으로 인해 유치하게 구는 것이 싫고, 또 누군가에게 감정 에너지를 쏟아붓는 것 자체가 이상스럽게 느껴진단다. 여력이 되면 그들은 차라리 몸 단련에 시간을 투자하려 한다. 체육관에서 보낸 시간은 감정의 소모나 배신 없이 그 보상을 근육으로 직접 얻고, 자존감도 높아지므로 전혀 아깝지 않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연애할 시간에 운동하러 간다는 소식을 접하며, 에로스가 최고의 정복자이던 시절은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팔방미인에 연애만 못하는 헤라클레스의 시대가 바야흐로 도래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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