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닐하우스, 전신주 없애고···‘두루미 명소’ 순천, 귀한 손님 더 받는다
지난 12일 오전 6시30분쯤 전남 순천만 용산 전망대로 가는 길 초입에 들어서자 “뚜루룩뚜루룩” 소리가 들렸다. 동트기 전 어둠 사이로 차량 전조등에 잠에서 깬 흑두루미 무리가 소란스러웠다. “원래는 전조등을 끄고 들어왔어야 했는데, 여기서부터는 끄고 이동할게요.” 강나루 순천시 명예습지안내인이 말했다. 걸어서 전망대를 오르는 동안 흑두루미들은 다시 조용해졌다.
30분쯤 지나 주위가 밝아지며 한반도 모양과 닮은 ‘검은 얼룩’이 보였다. 망원경 초점을 얼룩에 맞춰보니 수천 마리 흑두루미가 형체를 드러냈다. 밤사이 한 발을 날개깃 속에 넣고 자던 흑두루미들이 날개를 펴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밤새 바닷바람을 맞은 몸을 깨우는 기지개였다. 오전 7시 13분, 흑두루미 한 마리가 먹이터인 대대뜰로 ‘출근’을 시작했다. 오전 8시쯤, ‘검은 얼룩’ 대부분이 대대뜰로 자리를 옮겼다.
이날 순천만의 흑두루미 개체 수는 5117마리로 집계됐다. 지난해 월동 개체보다 약 1700마리 늘었다. 순천시는 흑두루미 먹이터를 기존의 대대뜰(62㏊)에서 인안뜰 일부(109㏊)까지 약 2.75배로 확장할 계획이라고 15일 밝혔다. 확장지 내에 있는 비닐하우스와 전신주도 제거하기로 했다.
흑두루미와 함께 사는 순천, 비닐하우스 ‘헌 집’ 부수고 ‘새 집’ 준다
순천시는 대대뜰 내 ‘희망 농업 단지’에서 지난해 약 200t의 벼를 생산해 겨울 철새의 먹이로 줬다. 당연히 농약도 사용하지 않았다. 벼를 수확했다가 논에 남아있던 먹이가 소진되면 매주 8t씩 볍씨를 흩뿌려줬다. 농가에는 벼를 생산해 팔 때보다 1㏊당 360만원 정도 더 소득을 낼 수 있도록 보상했다. 볏짚을 사료용으로 쓰기 위해 모아두지 않고 논에 널리 깔아두는 농가에는 ‘생태계서비스지불제’로 1㎡당 94.5원을 지급했다.
지난해 11월 일본 이즈미에서 고병원성 AI(조류 인플루엔자)가 발생해 흑두루미가 순천으로 ‘유턴’했을 때 최대 9841마리가 순천만에 머물렀다. 장익상 순천시 순천만보전과장은 지난 11일 흑두루미 먹이터 확장을 설명하며 “AI가 덜 확산하게 하려면 빽빽하게 있는 흑두루미를 분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순천시는 2026년까지 대대뜰 인근 인안뜰에 희망 농업 단지를 109㏊ 더 늘릴 계획이다. 전신주도 모두 제거한다. 순천시는 앞서 2009년에도 대대뜰 내 전신주 282개를 제거했다. 두루미류 상당수가 날다가 전선에 부딪혀 죽거나 다치기 때문이다.
순천시는 서식지를 파괴하고, 사람들이 드나들며 교란의 원인이 되는 비닐하우스 7동도 철거할 예정이다. 대대뜰처럼 ‘불빛차단용 가림막’도 설치한다. 갈대를 이용해 만든 가림막은 야간에 차량 불빛이 닿지 않도록 하고, 지역 주민에게 ‘경계심이 높은 흑두루미가 왔으니 논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메시지도 준다.
황선미 순천시 순천만보전과 주무관은 “흑두루미는 서식 환경을 보전하면 비슷한 환경을 좋아하는 다른 종도 같이 보존하는 효과가 있는 ‘우산종’”이라며 “보존을 통한 생태 관광으로 지역 경제의 선순환 구조가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순천시는 영산강유역환경청에 흑두루미 서식지 확대 사업을 건의했다. 노관규 순천시장은 “환경부에서 낸 야생생물 보전 종합계획에도 나오듯이, 우리 마을 멸종 위기 살리기 전략에서 지자체 역할이 매우 크다”며 “정부에서 예산의 우선순위를 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흑두루미 보호’에 어깨 건 지자체들···“인간이 만든 관할 구역 아니라 ‘두루미 겨울 나기 서식지’로 협력해야”
흑두루미는 세계에 1만8000여마리 정도 남은 멸종 위기 동물이다. 대부분이 일본 이즈미시와 순천만에서 월동한다. 지난 9일 순천시와 이즈미시가 진행한 한일 공동조사에서 확인된 흑두루미 개체 수는 1만5653마리였다.
지난해 12월 환경부의 겨울 철새 서식 현황 조사에서는 흑두루미 약 1000마리가 충남 서산 간월호 인근에 있었고, 순천만 인근인 광양만·갈사만에도 285마리가 머무는 것이 확인됐다. 흑두루미들은 순천만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지난 12일 순천시 주도로 두루미 주요 월동지인 강원 철원군, 국내 2위 흑두루미 월동지인 충남 서산시, 순천만 인접 지역인 전남 여수·광양시, 고흥·보성군 등 7개 지자체가 ‘흑두루미 서식지 보전을 위한 지방자치단체장 업무 협약식’을 열었다. 각 지자체는 서식지 위협 요인을 분석하고, 관리계획을 수립했던 경험과 지식을 공유하고, 개체군 변화를 지속해서 모니터링하기로 했다. 정부에는 ‘한반도 흑두루미 벨트’를 구축해달라고 제안했다.
유코 하라구치 일본 이즈미시 두루미 박물관 수석 큐레이터는 지난 13일 경향신문과 서면 인터뷰에서 “만약 AI가 발생했을 때 흑두루미가 모두 이즈미에 머물렀다면 더 많은 두루미가 죽을 수 있었다”며 “순천으로 흑두루미가 분산된 게 많은 두루미의 생명을 구했다. 매우 감사했다”고 말했다. 이어 국내 지자체의 ‘남해안 흑두루미 벨트 구축’에 대해서는 “인간이 만든 관할 구역은 흑두루미와 무관하다. 이즈미시, 순천시로 나뉠 게 아니라 두루미의 ‘겨울나기 서식지’로 생각하고 협력해야 한다”며 환영했다.
강한들 기자 handl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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