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현장] K배터리 미래 이끌 어벤저스 … 이름하여 '조·선·최·강'
대한민국의 차세대 먹거리인 배터리.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 중 하나이자 대한민국이 세계적 기술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여기에 세계적으로 실력을 인정받는 과학자들이 있다. 이름하여 '조.선.최.강'. 조는 조재필 울산과학기술원(UNIST) 에너지 및 화학공학과 교수, 선은 선양국 한양대 에너지공학과 교수, 최는 최장욱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교수, 마지막 강은 강기석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다. 우리가 흔히 배터리라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2차전지, 더 구체적으로는 리튬이온배터리다. 3단계의 과학적 설명이 필요하다. 먼저 배터리. 정의를 내리자면 화학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바꾸는 장치다. 화학반응을 통해 전자의 이동이 이뤄지는데 전자를 잃는 걸 산화라 하고 전자를 얻는 걸 환원이라 한다. 이렇게 전자를 잃고 전자를 얻는 과정에서 전기가 발생한다.
두 번째, 2차전지. 전자의 이동은 이온이란 것이 음극과 양극을 오가는 과정에서 균형을 맞춰 이뤄진다. 전자와 똑같은 수만큼 이온이 움직인다. 이온이 양극에서 음극으로 이동하면 충전되고, 반대로 음극에서 양극으로 이동하면 방전, 즉 에너지가 방출된다. 충전과 방전을 오가면서 에너지를 반복해 쓸 수 있는 배터리. 그래서 한 번 쓰고 버리는 배터리가 1차전지, 반복해 쓰는 배터리가 2차전지다.
마지막 세 번째, 리튬이온배터리. 배터리라고 다 같은 배터리가 아니다. 성능이 좋아야 한다. 성능은 에너지 밀도가 말해준다. 쉽게 말해 부피나 무게에 비해 많은 에너지를 갖고 있는 것. 에너지가 많다는 건 뽑아낼 수 있는 전자의 개수가 많은 동시에 양극과 음극 사이에 전위의 차이(전압)가 크다는 의미다. 폭포로 치면 높이가 높고 폭이 넓어야 한다. 나이아가라처럼. 현존하는 이온 중 여기에 가장 적합한 것이 리튬이다. 주기율표상 수소 바로 아래 있다. 원소기호 3번. 밀도가 낮아 물에도 뜰 수 있는 가장 가벼운 금속, 그래서 2차전지 하면 리튬이온배터리다.
이제 2교시. 리튬이온배터리의 구조와 작동원리다. 리튬이온배터리를 구성하는 요소는 크게 네 가지. 양극재, 음극재, 전해질, 분리막이 그것이다. 충전 땐 리튬이온이 양극재에서 빠져나오고 이걸 음극재가 받아준다. 반대로 방전 시에는 음극재에서 나온 리튬이온이 양극재로 들어간다. 이온이 움직일 통로가 필요한데 그게 전해질이다. 양극과 음극은 서로 닿으면 안 된다. 부닥치면 소위 쇼트가 난다. 이온만 통과시키고 직접적인 접촉은 막아야 한다. 그러려면 분리막이 있어야 한다. 2차전지에 대한 연구는 모두 이 네 가지 요소에 국한돼 있다고 보면 된다. 양극재와 관련해서는 이곳에 얼마나 많은 리튬이온을 저장해 이를 음극재로 보낼 수 있느냐, 어떤 양극활물질을 사용해 배터리 전압을 높일 것이냐의 문제다. 음극재는 리튬이온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받아들여 저장을 잘하느냐, 그래서 최소한의 용량 감소로 오랫동안 배터리를 사용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전해질은 이온을 잘 이동시켜야 하고 열에도 잘 견뎌야 한다. 배터리의 반복적 충·방전은 열의 발생을 가져오고 이는 화재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용어를 빌리자면 발화점이 높아야 한다. 현재 리튬이온배터리의 전해질은 액체다. 그래서 전해액이라고 한다. 가연성 높은 전해액 대신 젤 형태나 고체 전해질을 사용할 수 있다면 그만큼 화재 위험을 줄일 수 있다. 단, 틈이 생겨 이온 전달이 안 되면 곤란하다. 전기가 나간다. 분리막은 가능한 한 얇게 만드는 기술이 중요한데 현재는 폴리에틸렌(PE)이나 폴리프로필렌(PP) 같은 플라스틱 필름을 사용한다.
한 가지 더 있다. 꼭 리튬이어야 하느냐는 질문. 리튬이온이 아니고 다른 이온이 왔다 갔다 하는 배터리를 만들 수는 없을까 하는 이슈다. 좀 먼 미래의 이야기일 수 있지만 이 역시 학문적 연구 대상에서 빠질 수는 없다.
이제부터 소개하는 대한민국 배터리 연구의 대표주자 4인의 연구 분야도 여기에 집중돼 있다.
조재필 교수는 양극재 분야에서 '세계 최초' 기록을 보유한 인물이다. 양극재와 음극재 중 화학적으로 형, 동생을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분명 양극재가 형님이다. 전기자동차가 1억원짜리라면 양극재가 1500만원은 된다. 이 양극재에 리튬이온을 많이 넣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양극활물질이란 게 중요하다. 이걸 어떤 구조로 만드느냐가 관건. 가장 일반적인 게 NCM(니켈·코발트·망간)이다. 이 중 중요한 물질이 니켈. 통상 니켈의 비율이 1%포인트 올라가면 자동차 주행거리가 8~9㎞는 늘어난다. 가격도 코발트의 3분의 1 정도다. 그래서 양극재에 대한 연구는 니켈의 함량을 얼마나 높이느냐에 초점을 맞춘다. 조 교수는 이를 97%까지 올렸다. 그리고 그 구조를 단결정으로 하느냐, 다결정으로 하느냐도 중요하다. 단결정이라 하면 말 그대로 한 덩어리로 하는 것이고 다결정은 각설탕 여러 개를 모아놓은 식으로 하는 것이다. 조 교수의 연구 분야는 단결정. 단결정 구조는 오래 쓰면 금만 가지 부서지지 않는다. 수명이 길다.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가 한 번에 160만㎞를 가는 반영구적 전기차를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을 때 단결정 양극재를 염두에 둔 것이다. 조 교수의 강점은 이 97% 단결정 양극재를 만들 때 반드시 들어가던 수세 공정, 즉 물로 불순물을 제거하는 과정을 없앴다는 점이다. 니켈은 전기로 구워 만드는데 그러다 보면 리튬 불순물이 생긴다. 이 불순물은 다결정보다 단결정일 때 더 많이 나오는데 배터리 성능에 치명적이다. 또 가스를 생성시켜 화재 위험성도 높인다. 그래서 물로 씻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요약하자면 무수세(無水洗) 97% 니켈 함유 단결정 양극 소재. 이게 조 교수가 보유한 세계 최초의 기록이다. 조 교수는 이 기술로 2018년 직접 회사를 만들었다. 현재 직원 61명을 둔 에스엠랩이라는 스타트업. 스틱벤처스 등 21개 금융회사에서 1000억원이 넘는 자금을 모았다. 작년 말 상장을 시도하다 실패를 맛보았지만 오히려 약이 됐다는 조 교수. 기술이 어디 갈 리 있겠느냐는 자신감으로 무장돼 있다.
선양국 교수는 1세대 주자다. 1990년대 후반 2차전지의 중요성이 전 세계적으로 부상되는 시점부터 이 분야에 뛰어들었다. 당시는 삼성종합기술원 연구원이었다. 2000년 한양대 교수로 자리를 옮겨 시작한 연구가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었다. 양극재에서 니켈 성분을 올리면 에너지 밀도는 높아지나 치명적인 두 가지 부작용이 발생한다. 첫 번째가 수명 단축. 충·방전을 반복할수록 성능이 떨어진다. 두 번째는 화재 위험성이 높다는 것. 니켈을 3분의 1만 사용하면 발화점이 306도인 데 비해 니켈 100%면 발화점이 181도가 된다. 그만큼 불이 날 확률이 높다는 것. 선 교수는 2005년 그 원인을 확실히 규명했다. 니켈 성분이 높아질수록 축구공처럼 생긴 양극재 안에 논두렁처럼 금이 가고 그 사이에 전해질이 흘러들어가 불순물 층이 생겨서 빚어지는 현상임을 발견했다.
원인을 밝혔으니 이제 해결책을 제시할 차례. 선 교수는 니켈 함량을 중심부는 높게, 주변부는 낮게 배율을 달리했다. 이른바 코어셸(Core-Shell) 방식. 중심과 외곽이 겹치는 지점은 일종의 계단과 같은 단절이 있는데 이를 경사면으로 만들었다. 이런 개념을 전문용어로는 '농도구배(concentration gradient)'라고 한다. 4년 뒤인 2009년의 성과였다. 돈이 들어왔다. 이 기술을 기업에 이전했다. 에코프로비엠, 포스코케미칼, LG화학 등이 거액을 지불하고 이 기술을 사갔다.
선 교수는 이 기술을 더욱 고도화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 나온 기술은 양극재 내 입자 형태를 다각형 구조에서 마치 막대기 모양으로 바꾸는 기술. 원리는 간단하다. 집 외곽에 벽을 만드는데 돌담 쌓듯이 하던 것을 길쭉한 장작더미를 올려쌓는 방식으로 전환한 것. 밖에서 담을 밀었을 때 돌담은 자칫 와르르 무너지지만 장작더미는 밀리긴 해도 무너지지는 않는 원리다. 다른 화학물질을 집어넣어 결정구조를 바꾼 것인데 이 기술은 국내 대학 사상 가장 비싼 값에 LG화학에 팔렸다. 중국의 저가 공세에 맞설 수 있는 독자적 기술을 개발해 산학협력사에 새 이정표를 세운 그는 과학기술훈장 웅비장과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을 수상했다.
최장욱 교수의 연구는 음극재에 보다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소위 분자도르래 개념을 밝혀냈다. 분자구조가 우물에서 물을 긷는 도르래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2016년 노벨화학상의 주제와 관련 있다.
음극재도 양극재와 마찬가지로 리튬이온을 안정적으로 저장해야 한다. 가벼운 건 기본이다. 지금까지 나온 소재 중 대세는 흑연이다. 연필심을 생각하면 된다. 전기차는 주행거리가 경쟁력의 핵심인데 흑연이 아쉬운 지점이 바로 여기다. 그 대안이 실리콘. 한 번 충전해서 500㎞를 달릴 수 있는 전기차가 실리콘을 포함한 음극재를 사용하면 600㎞까지 갈 수 있다. 흑연을 실리콘으로 얼마만큼 대체하느냐에 따라 주행거리는 달라진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법. 최 교수는 "주행거리는 늘릴 수 있지만 수명은 짧아진다"면서 "그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실리콘과 흑연의 비율을 어떻게 맞추느냐와 탄소와 실리콘의 복합구조를 어떻게 디자인하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한다. 하나 더. 배터리 전극에 물질을 붙이는 고분자 바인더도 중요하다. 분자도르래는 바로 여기에 적용되는 개념이다. 음극재에 아예 흑연을 안 쓰고 리튬금속을 쓰는 것도 최 교수의 연구 분야다. 이른바 리튬금속 음극재. 이건 이미 상당한 상용화 연구가 진행 중이다. 미국 하버드대 박사과정을 다니다 창업한 중국계 미국인이 있는데 그가 창업한 회사가 SES AI사. 보스턴에 위치한 이 회사는 직원 200명 정도를 거느린 나스닥 상장사다. 이 회사가 최 교수를 작년에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실력과 국제화 감각을 갖춘 과학자가 국경을 넘어 활동할 수 있는 좋은 사례를 만들었다. 최 교수는 "아직 상용화를 위해서는 추가 개발이 필요하지만 파일럿 라인은 구축해놓고 있다"며 "중국 상하이와 우리나라 충주에 공장이 있다"고 말했다. 현재로선 지속성에 문제점이 발견돼 충·방전 횟수를 지금보다는 더 늘려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지만 한계를 극복하면 배터리의 새 역사를 쓰게 될 게 분명하다.
강기석 교수는 양극재에서 연구를 시작했지만 현재는 음극재는 물론이고 고체 전해질 그리고 더 나아가 리튬 소재를 넘어서는 분야까지 폭넓은 연구를 진행하는 차세대 주자다. 대표적 연구 분야가 코발트, 니켈 등의 전이금속을 없앤 양극 소재를 개발하는 것. 소위 산소를 이용한 가벼운 양극 소재를 만들고 리튬·공기전지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강 교수 연구의 종착역이다. 리튬·공기전지는 이론적으론 에너지 밀도가 높으나 짧은 수명이 한계. 강 교수는 이른바 계층 다공성이라는 양극 구조체를 설계해 전기화학반응이 일어나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새로운 촉매를 개발해 세계 최고 기록을 세웠다. 배터리 강자인 영국 옥스퍼드대의 피터 부르스 교수, 케임브리지대의 클레어 그레이 교수 같은 쟁쟁한 과학자들과 경쟁한다. 그레이 교수는 삼성 갤럭시 배터리 폭발 사건을 조사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강 교수의 또 다른 도전은 리튬 대체재를 찾는 것. 그는 이렇게 말한다. "리튬은 주기율표상 1족 원소다. 리튬 1가 양이온 하나에 전자가 하나 운반될 수 있다는 건데 전자가 많아야 에너지 밀도가 높아지고 배터리 성능이 좋아진다. 그렇다면 주기율표상 2족에 있는 2가 양이온을 이용해, 즉 전자 2개를 운반할 원소로 배터리를 만들면 안 되느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그게 마그네슘이고 칼슘이다. 앞으로 마그네슘이온배터리가 2차전지의 대세가 되는 날이 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실제 강 교수는 이 연구를 미국 석유회사인 쉘과 공동으로 수행한다. 고래기름 운송무역에서 비즈니스를 시작해 석유를 넘어 이제 전기로 사업 영역을 넓혀가는 다국적 기업이다.
강 교수가 세계에서 독보적으로 개발한 분야도 있다. 이른바 인공대사 배터리.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배터리다. 그는 "배터리라는 것이 화학반응을 통해 전자를 빼내는 건데 이런 원리가 우리 몸속에서도 일어난다"면서 "인체 내에 전기화학반응을 가능케 하는 분자를 찾아내 양극재, 음극재의 소재로 쓸 수 있다는 생각에 도달했다"고 말한다. 일반인에게는 허황되게 들릴지 몰라도 이미 가시적 성과가 나왔다. 인체 대사작용 중 호흡에 관여하는 미토콘드리아 내의 리보플래빈의 전기화학적 특징을 파악해 배터리로 만들었다. 그를 한국공학한림원 수상자로 추천한 차국헌 서울대 교수는 "강 교수의 이런 도전정신을 해외에서도 알아준다"면서 "상용화 여부를 불문하고 대단한 발견"이라고 평가했다.
[손현덕 주필·사진/김호영·박형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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