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경찰 ‘머리 꼭대기’ 위에…이 독립운동가의 진술 전략

한겨레 2023. 1. 15.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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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술은 체포되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1941년 1월7일이었다.

체포된 곳은 창덕궁 서편 금호문 밖 원동 158번지 김태준 집이었다.

6. 경성서대문경찰서경부 吉岡定次郞, '피의자 이관술 신문조서 제12회', 3462쪽, 1941년 6월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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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임경석의 역사극장
1941년 1월 체포된 ‘공산당 재건 거두’ 이관술

허위 진술로 일본 경찰 속여 끝까지 동료 지켜내
옥중에서 찍은 31살 이관술 모습. 1933년 4월11일 반제동맹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을 때 일본 경찰이 찍었다. 임경석 제공

“그해 연말에 다시 상경하니 예의 서대문서 사건이 벌어졌다. 나는 사건의 수습을 위하여 원동(苑洞) 김태준(金台俊) 동무와 처음 만났고, 그 뒤에 다시 함북으로 떠나는 데 관한 몇 가지 부탁을 하러 김태준 동무의 집에를 다시 갔다가, 숨어 있던 형사대에게 잡히고 말았다.”1

이관술은 체포되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1941년 1월7일이었다. 세간에서 ‘서대문서 사건’이라고 부르는, 비밀결사 경성콤무니스트그룹(경성콤그룹) 검거 사건에 말려들었다. 체포된 곳은 창덕궁 서편 금호문 밖 원동 158번지 김태준 집이었다.

김태준이 누군가? 그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한 수재로 <조선한문학사>(1931), <조선소설사>(1933)를 저술한 35살의 소장 국문학자였다. 1939년부터는 경성제대에서 ‘조선문학’ 강좌를 맡은, 강사 신분의 대학 교원이기도 했다. 경성제대 강사로 취임했을 때는 신문에 얼굴 사진과 함께 큰 기사가 실렸다.2

그럴 만큼 김태준은 장래가 촉망되는 유망한 젊은 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또 하나의 얼굴을 갖고 있었다. 일본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지하운동에 참여했던 것이다. 비밀결사의 동지였다. 경성콤그룹 구성원이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반일 민족주의자와의 연대를 모색하는 인민전선부 간부직을 맡고 있었다.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참고 문헌 1.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 <현대일보> 1946년 4월19일

2. ‘城大 강사에 취임, 高橋씨와 함께 조선문학 강좌 담당’ , <동아일보> 1939년 2월9일3. ‘조선총독부관보’ 1026호, 1930년 6월6일

4. 이관술, 앞의 글5. 이순금, ‘오빠 이관술 동지 검거의 소식을 듣고서’ , <현대일보> 1946년 7월15일

6. 경성서대문경찰서경부 吉岡定次郞, ‘피의자 이관술 신문조서 제12회’, 3462쪽, 1941년 6월3일. ‘이관술 외 15명 형사제1심소송기록’ 11, 1942년,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문서번호 1397. 신주백, ‘박헌영과 경성콩그룹’ , <역사비평> 13, 272쪽, 274쪽, 1991년

8. 경성서대문경찰서경부 吉岡定次郞, 앞의 글, 3461~34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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