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동물 의료보험을 기다립니다 [서상혁 수의사의 동물과 사회]
편집자주
동물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수의사이자 동물병원 그룹을 이끄는 경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동물과 사람의 더 나은 공존을 위해 지금 필요한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TV 속 행복한 가정을 묘사하는 광고에는 언제나 반려동물이 함께 등장하죠. 최근 반려동물에 관한 가장 흥미로운 화두는 반려동물을 인간처럼 여기는 펫휴머니제이션(Pet Humanization) 문화의 확산이 아닐까 합니다. 2020년 오픈서베이가 조사한 반려동물 트렌드 리포트에 의하면 '반려동물은 가족인가?'라는 질문에 양육 가구의 85.6%가 '그렇다'라고 답했습니다.
동물병원 현장에서 느끼는 펫의 인간화는 훨씬 더 극적입니다. 예전이라면 포기했을 치료도 웬만해선 포기하지 않습니다. 암에 걸린 반려견의 병간호를 위해 회사를 휴직하거나, 희소한 병을 앓는 반려묘의 치료를 위해 전국 동물병원을 순회하는 보호자를 보는 일도 더 이상 놀랍지 않습니다.
"와! 제가 병원에서 쓰는 초음파랑 같은 모델이네." 얼마 전 의사인 한 반려견 보호자가 놀라며 했던 말입니다. 양질의 치료를 원하는 보호자 요구에 맞춰 사람 대학병원에서나 봤던 최신 의료 장비를 갖춘 동물병원이 점차 늘고 있습니다. 간판에서 동물만 지우면 사람 종합병원과 구분이 쉽지 않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동물 의료 서비스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의료비 상승을 불러오게 됩니다.
많은 보호자가 동물병원 비용이 비싸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동물병원 비용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 매우 낮은 수준입니다. 구매력지수(Purchasing Power Parity)를 기준으로 보면 동남아시아보다 낮다는 통계도 존재합니다. 게다가 동물병원은 동일한 사람 의료 장비를 사용하지만, 사람 환자에 비해 동물 환자의 숫자는 턱없이 적습니다. 반면 환자당 투입되는 의료진 숫자는 동물이 더 많은 경우도 허다합니다. 이런 이유로 동물병원은 사람병원보다 효율이 낮을 수밖에 없고, 이는 자연히 비용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동물 의료비가 비싸다고 느끼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동물에는 없고 사람에만 있는 국가 의료보험의 존재입니다. 기본적으로 동물병원 치료비는 전액 보호자 부담입니다. 보험사마다 동물 의료보험 상품이 존재하지만, 가입률이 1%에도 못 미칩니다. 보험이 있는데 왜 가입하지 않는 걸까요? 상품이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작 중요한 치료 항목은 보장하지 않는 보험보다 보호자는 적금을 드는 편을 선택합니다.
보험사도 이런 상품만 내놓는 이유가 있습니다. 동물보험 가입률이 10%를 웃도는 일본이나 20%를 넘는 유럽과 달리 우리나라는 보험 상품을 설계할 수 있는 신뢰할만한 동물 의료 데이터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데이터가 없으니 좋은 보험 상품을 설계하기 힘들고 뻔한 상품만 내놓다 보니 보호자의 외면을 받는 악순환이 이어집니다. 결국 믿을 수 있는 의료 데이터가 나오지 않으면 보호자는 영원히 의료비 부담과 씨름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수의사를 대상으로 언제 만족스러운 치료가 이루어지는지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많은 수의사가 '보호자가 수의사를 신뢰했을 때'라고 답했습니다. 수의사와 보호자는 반려동물의 건강한 양육을 책임지는 동반자이자 파트너입니다. 수의사는 보호자가 나를 믿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하고, 보호자는 수의사가 과잉 진료를 하는 건 아닐까 의심하는 상황에선 결코 건강한 파트너 관계가 형성될 수 없습니다. 수의사와 보호자 사이의 믿음의 벨트가 흔들릴 때, 그 피해는 고스란히 가족 같은 동물에게 돌아갑니다.
하루빨리 제대로 된 동물 의료보험이 만들어지길 바랍니다. 수의사는 동물에게 필요한 최선의 진료를 다하고 보호자는 진료비 부담에서 벗어나는 세상, 진정한 펫휴머니제이션 시대는 그제야 열릴 것입니다.
서상혁 아이엠디티 대표이사·VIP동물의료센터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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