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멘터리] "슬램덩크", 인터넷 없는 세상을 경험한 마지막 세대의 '라스트 댄스'
며칠 전 아침 출근길이었습니다. 라디오를 켜자 '너에게로 가는 길'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아침 7시 FM 라디오 프로그램의 첫 선곡 치고는 좀 튄다 싶었는데, DJ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무슨 노래인지 알게 됐습니다. 박상민이 부른 "슬램덩크" TV 애니메이션의 주제곡이었습니다.
애니메이션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더 퍼스트 슬램덩크(이하 더 슬램덩크)"가 연초 극장가에서 "아바타"와 맞붙어 흥행 2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개봉 11일 만에 80만 관객이 봤습니다. "아바타"에 비해 확보한 스크린 수는 적지만 좌석 판매율은 1위입니다. 정서적 공감 측면에서도 "아바타"에 훨씬 앞서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작한 지 5분 만에 눈물이 흐른다'는 얘기까지 들려옵니다.
주말 이른 시간에 "더 슬램덩크"를 보러 갔는데 제 자리 왼쪽 좌석에 혼자 온 여성이, 오른쪽 좌석에도 혼자 온 남성이 앉았습니다. 흔치 않은 경험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혼자서 조용히 과거의 자신과 마주하러 온 사람들 같았달까요.
"슬램덩크"는 일본에서 1990년~96년 주간 "소년점프"에서 연재됐고, 한국에서는 1992년~96년 주간 "소년챔프"의 별책부록에 실렸습니다. 그리고 IMF 직후인 1998년~99년에 SBS에서 만화 영화로 방송됐습니다. 그런데 한일 양국에서의 엄청난 인기에도 불구하고 원작자인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후속편을 내놓지 않고 손을 뗐습니다. 그러다 무려 26년 만에 직접 감독을 맡아 애니메이션 영화로 내놓은 겁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 후의 이야기'를 다루지 않고 "슬램덩크" 원작에 나오는 유명한 대결인 산왕공고와 북산고의 전국대회 32강전 경기로 돌아갑니다. 특히 원작 만화에서는 강백호, 서태웅, 채치수, 정대만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포인트 가드 송태섭의 스토리가 이야기의 뼈대를 이룹니다.
솔직히 강백호를 빼고는 주전 5인방의 이름도 잘 모르고 '짤'과 '밈'으로만 접했오다가, "더 슬램덩크"로 "슬램덩크"를 처음 보는데도 희미한 기시감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2020년 넷플릭스 시리즈 "더 라스트 댄스" 탓이었을 것 같습니다.
1990년대는 농구의 시대였습니다. '농구대잔치'와 "슬램덩크", "마지막 승부"가 90년대를 상징하는 콘텐츠였지요. 한국에서 "슬램덩크"가 유행할 무렵, 미국의 프로 스포츠 경기를 볼 수 있는 마땅한 방법이 없던 그 시절, 추억의 AFKN에서는 NBA를 종종 중계해줬습니다. 그때 봤던 시카고 불스와 마이클 조던을 "더 라스트 댄스"에서 다시 만나면서 약간의 감상에 젖기도 했습니다.
당시 시카고 불스를 이끌던 마이클 조던은 NBA를 넘어 야구의 베이브 루스, 권투의 무하마드 알리, 축구의 펠레에 비견되는 글로벌 스타였습니다. '더 라스트 댄스'라는 제목은 시카고 불스 '왕조'를 지휘했던 필 잭슨 감독이 시카고 불스를 떠나기로 한 마지막 시즌 개막에 앞서 선수들에게 나눠 준 팀 핸드북 표지에 쓰여있던 말에서 왔습니다.
"더 라스트 댄스" 1편은 마이클 조던이 별 볼 일 없던 하위팀 시카고 불스에 입단하던 1984년부터 그려 나갑니다. "슬램덩크"가 나오기 6년 전입니다. 1984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3순위로 지명받아 입단한 조던은 데뷔하자마자 팀을 바꿔 나갑니다. 데뷔 후 세 번째 경기인 숙적 밀워키 벅스와 대결. 3쿼터까지 85대 76으로 뒤지면서 패색이 짙어가던 시카고 불스. "더 라스트 댄스"에서 마이클 조던은 그때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예전의 불스 같으면 한탄이나 하고 시합을 포기했겠죠. '그래 패배를 인정하고 다음 경기에서 잘 하자' 그런데 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아직 안 끝났잖아?'"
결국 마이클 조던의 활약으로 시카고 불스는 116대 110 역전승을 거둡니다. 그런데 "더 슬램덩크"에는 이보다 더 유명한 장면과 명대사가 있죠.
어렵게 진출한 전국대회 2회전에서 북산고는 하필이면 전년도 우승팀이자 전국 최강팀인 산왕공고를 만납니다. 36대 60. 예상대로 큰 점수 차로 끌려가며 희망이 안보이는 상황에서도 안 감독은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합니다. "포기하면 그 순간이 바로 시합 종료예요"
포기와 관련한 "슬램덩크"의 유명한 명대사가 또 있지요. "그래 난 정대만. 포기를 모르는 남자지"
"슬램덩크" 원작의 주인공이었던 강백호는 자신의 첫 농구화로 '에어 조던6'를 신습니다. "왼손은 거들 뿐"이란 명대사로 유명한(이 대사의 정확한 뉘앙스를 아는 데 한참 걸렸고, 지금도 정확한 의미를 파악한 건지 자신이 없지만) 강백호가 "더 슬램덩크"에서 보여 준 버저비터 샷은 마이클 조던의 '더 샷'(89년 플레이오프 1라운드 5차전에서 클리블랜드를 상대로 경기 종료 3초를 남기고 한 점 차로 지고 있던 상황에서 마이클 조던이 성공시킨 버저비터)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이른바 '슬램덩크 세대'는 넓게 보면 7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에 태어나서 한창 "슬램덩크"가 출간되고 TV에서 방영될 때 초·중·고를 다닌 세대입니다. 주위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본 결과, "슬램덩크"의 핵심 세대는 80년대 생입니다. 이제 30대 중반에서 40대 중반에 이른 이 세대는 "슬램덩크"가 자신들의 첫 번째 '복고 콘텐츠'라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응답하라' 시리즈 같은 레트로 콘텐츠도 재미있게 보긴 했지만 자신들의 이야기라고 느끼지는 못했던 세대가 처음으로 가져보는 '우리 세대의 레트로 콘텐츠'. 청소년기로 시간 여행을 떠나게 함과 동시에 어느덧 배 나온 아저씨가 돼 있는 현실감도 일깨우는 콘텐츠. (포털 사이트 관람객 영화 한줄평 "너희들은 안 늙었구나…"를 보고 가슴이 아렸습니다)
한 사회에서 특정 세대의 영향력은 그 세대가 얼마나 많은 '레퍼런스급' 문화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가에 달려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흔히 "그것도 몰라?"라는 말로 특정 책, 영화, 대중음악 등을 지렛대로 세대를 나누고 자신들만의 정서를 공유합니다.
미디어에서 비유적으로 쓰는 표현들, 이를테면 '이 시대의 조용필', '서태지에 비견된다', '차범근과 동급' 같은 말들은 은근히 화자 세대의 상징 문화 자본의 힘을 드러냅니다. 그 시대를 겪지 않은 사람들은 뜻은 알더라도 그 의미와 맥락을 가슴속으로부터 공유하기는 힘들죠.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는 속담이 무슨 뜻인지는 알아도 실감은 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거죠. 그래서 역대 최고의 축구선수가 차범근이냐, 박지성이냐, 손흥민이냐를 놓고 벌이는 논쟁은 세대 간 문화 자산의 우위 다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슬램덩크"는 '콘서트 7080', '1988 서울 올림픽', '조용필', '서태지', '응답하라 시리즈' 등 뚜렷한 시대적 문화 자산과 코드를 보유한 그 앞 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신들만의 확고한 레트로 문화 자산이 적었던 80년대 생들에게 자신들도 내세울만한 문화 자산이 있다는 것을 현시하고 동류 의식을 공유할 기회를 안겼습니다. ('슬램덩크 세대'도 "슬램덩크"를 연재 만화로 본 세대와 TV 애니메이션으로 본 세대로 나눠지기도 합니다) 80년대 생이 사회적으로 화제가 될 정도의 '복고' 콘텐츠를 갖게 됐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이들도 완벽하게 기성세대가 됐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요즘 같은 스트리밍 드라마의 시대, 댓글과 피드백이 범람하는 시대에 "슬램덩크"처럼 끝내면 욕을 먹을지도 모릅니다. 32강전에서 우승 후보인 산왕공고를 1점 차로 꺾었지만 '이 경기에서 체력을 다 소진하는 바람에 이후 3연패하고 탈락했다'라면서 갑작스럽고 허무하게 글로 끝내 버리죠. 어쩌면 그래서 "슬램덩크" 팬들이 지금까지도 "슬램덩크"의 '라스트 댄스'를 기다려 왔을지도요.
"슬램덩크"의 엔딩은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 유행했던 카타르 월드컵의 불꽃 같은 16강전과 그에 이은 브라질전 대패의 엔딩과 닮았습니다. 우리에게 카타르 월드컵은 16강 포르투갈 전의 하얗게 불태운 시간들로 기억되겠죠. "슬램덩크"가 서태웅과 강백호의 마지막 하이파이브로 기억되듯이 말이죠.
덜컥 끝나버리는 "슬램덩크"의 결말은 이 영화를 결말의 영화가 아니라 과정의 영화로 만듭니다. '영광의 순간은 지금'이며, '농구를 정말 좋아한다'는 강백호의 대사처럼 "슬램덩크"는 내가 모든 것을 쏟아부은 순간 만으로도 완벽하므로, 속편이 필요 없는 아니, 속편이 있어서는 안되는 영화가 되었습니다. 뭘 해도 속편은 '거들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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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 기자joole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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