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글로리》, 거꾸로 읽는 《상속자들》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2023. 1. 15.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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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단점에도 시청자를 몰입하게 하는 매력
《더 글로리》가 보여주는 커리어적 연대

(시사저널=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옛날 옛날, 그리 멀지 않은 옛날. 명문 사립 '제국고등학교'에는 한때 학교 일진이었던 김탄(이민호)이라는 금수저와 힘없는 학생들을 괴롭히는 최영도(김우빈)라는 또 다른 금수저가 재학 중이었다. 부모 재력에 따라 서열이 결정되는 이곳엔 가난을 상속받은 차은상(박신혜)이란 학생도 있었다. 사회배려자 전형으로 입학한 차은상은 가난하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멸시당했다. 그러나 김은숙 작가로부터 캔디 DNA를 이식받은 우리의 씩씩한 차은상은 그 어떤 굴욕 앞에서도 자존감을 꺾지 않았다. 그런 차은상의 기개에 반한 김탄과 최영도가 '나에게 이러는 여잔 네가 처음이야!'라는 정신으로 그녀의 남자가 되기 위해 러브 배틀을 벌인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 "나 너 좋아하냐?"라는 희대의 명대사를 남긴 드라마 《상속자들》(2013)이다. 김은숙 작가는 이 드라마 부제를 통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그 후 10년. 그사이 고2 딸을 가진 학부형이 된 작가의 눈에 고등학교는 더 이상 판타지일 수 없었다. 마침 딸이 물었단다. "엄마는 내가 죽도록 누구를 때리면 더 가슴 아플 것 같아? 죽도록 맞으면 더 가슴 아플 것 같아?" 그 질문이 안긴 충격에서 학교폭력 피해자의 복수를 그린 《더 글로리》가 시작됐다. '멜로 대가' 김은숙 세계에서 강력한 무기로 작동해온 건 '신데렐라 판타지'였다. 이른 나이에 조실부모하든(《도깨비》 지은탁), 차은상처럼 태생이 흙수저든, 가난한 스턴트우먼(《시크릿 가든》 길라임)이든, 그녀들이 외롭고 슬플 땐 돈과 권력과 힘을 쥔 남자가 나타나 창과 방패가 돼주곤 했다.

《더 글로리》의 가난한 집 딸 문동은(정지소·송혜교)에게 거세된 건 바로 이 판타지다. 박연진(신예은·임지연) 일행으로부터 그 어떤 치욕스러운 폭력을 당해도 동은에겐 도움을 건네는 백마 탄 왕자도, 도깨비도, 이탈리아 장인이 한 땀 한 땀 수놓은 트레이닝복을 입고 다니는 재벌도 없다. 심지어 담임 선생님은 가해자를 두둔하고, 학교는 방관하고, 경찰은 묵인하고, 엄마마저 푼돈 몇 푼에 딸을 배신한다. 그나마 비빌 언덕이었던 양호 선생님은 동은을 도왔다는 이유로 좌천당한다. 연진의 악행엔 어떤 이유도 없지만, 학교와 사회가 약속이라도 한 듯 가해 주동자 연진을 감싸고 도는 데는 이유가 있다. 연진 집안의 재력과 인맥, 동은 집안의 가난과 결핍이 그것이다. 차라리 죽어버릴까. 차가운 한강에서 동은은 마음을 고쳐먹는다. 죽을힘을 다해 복수하자. "오늘부터 내 꿈은 너야, 연진아."

넷플릭스 《더 글로리》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다소 허술한 개연성, 그럼에도 작용하는 힘

가해자들을 응징하기 위해 오랜 시간 치밀한 복수를 계획한다는 점에서 문동은은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씨스러운 면이 있다. 그러나 치밀함은 한 수 아래다. 파트2가 나와야 온전한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복수 과정에서의 개연성은 그리 탄탄하지 못하고 '저게 말이 돼?' 싶은 구간도 꽤 있다. 박연진 딸의 담임이 되기 위해 학교 재단 이사장 저택 쓰레기통을 6개월 동안 뒤져 약점을 잡는다는 설정도 살짝 갸웃한데, 이 과정에서 강현남(염혜란)이란 조력자를 덤으로 얻는 것도 너무 우연적이다.

또 다른 조력자 주여정(이도현)과 연대하는 과정도 마찬가지. 10년 넘게 치밀한 계획을 세운 사람의 복수치고는 우연이 너무 자주 개입하는 것 아닌가? 첫 번째 복수 대상이었던 학창 시절 담임교사를 그의 아들이자 학교 선배인 김수한(강길우)을 이용해 제거하는 방법에도 '으잉?'스러운 면이 있다. 꽃 알레르기와 천식 하나로 갑자기? 연진의 남편 하도영(정성일)에게 접근하기 위해 '바둑 고수'로 거듭나는 동은과, 그런 동은이 던진 미끼에 너무 쉽게 걸려드는 하도영의 에피소드도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더 글로리》는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단점이 있음에도 술술 넘기게 된다. '미친 드라마네~'를 연발하게 하는 재미도 상당하다. 나는 1회를 무심코 재생했다가 8회까지 논스톱으로 이어 달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 비슷한 시청 후기가 넘쳐나는 걸 보니 혼자만의 감상은 아닌 듯한데, 단점 하나 노출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달리는 작품도 대단하지만, 여러 단점을 노출하면서도 시청자를 몰입도 있게 빨아들이는 작품도 대단한 것이다. 필시 이 드라마가 뭔가를 건드리고 있다는 의미다. 그건 뭘까.

넷플릭스 《더 글로리》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더 글로리》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이 드라마엔 뭔가가 있다

먼저 사적 복수를 공적 복수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솜씨다. 방법은 전면에 내세운 '계급'이다. 문동은이 학폭을 당하는 이유. 학폭을 당하고도 사회 시스템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이유. 그 중심에 계급이 있다. 《상속자들》이 이러한 계급을 멜로를 부각시키는 양념으로 활용하는 데 그쳤다면, 《더 글로리》는 이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비판하고 이러한 주제의식을 장르와 유기적으로 섞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통쾌함을 느끼게 한다.

계급의식이 가해자들 내부에서도 작동한다는 점 역시 불특정 다수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열게 하는 부분일 것이다. 계급 간 불평등은 우리 사회 곳곳에 침투해 있으니 말이다. 문동은이 조력자 강현남과 주여정을 만나는 과정에 너무 많은 우연이 개입돼 있다고 앞서 언급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이 연대엔 단점을 뒤덮는 장점이 더 많다. 동은은 말한다. "피해자의 연대가 더 강할까, 가해자의 연대가 더 강할까?" 그건 알 수 없지만, 시청자가 확실하게 응원하고 싶은 인물들이 이 드라마엔 있다.

감각적인 대사와 말과 말 사이 조성되는 리듬감도 무시할 수 없다. 이것은 김은숙 작가가 오래전부터 보여왔던 재능. 다소 유치한 대사일지언정 그것이 타이밍과 맞물려 터질 때, 캐릭터의 매력에 얼마나 찰싹 감기는가를 우린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더 글로리》는 그러한 '은숙체'가 멜로 아닌 장르에선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지켜볼 수 있는 기회다. 결과적으로 '은숙체' 기세는 멜로 밖 영역에서도 남다르다. "타락할 나를 위해, 추락할 너를 위해" 같은 특유의 라임 돋보이는 작법은 여전하고, "신이 널 도우면 형벌, 신이 날 도우면 천벌"처럼 단어가 극 분위기와 맞물려 문학적으로 발화되기도 한다. 대사는 캐릭터성을 독창적으로 빚어내는 데도 일조한다. 현남이 "난 매 맞지만 명랑한 년이에요"라고 말할 때, 그녀는 기존 미디어에서 봐온 가정폭력 피해자들과는 다른 차원으로 방향을 튼다. 물론 쉽지 않은 캐릭터를 사랑스럽게 발화해 내는 염혜란 배우의 연기 내공이 맞물린 결과다.

염혜란 외에도 배우들의 연기가 하나같이 인상적이다. 임지연과 폭력 가해자로 등장하는 배우들은 자신의 필모에서 두고두고 거론될 만한 인상을 남긴다. 이도현은 그가 왜 최근 가장 주목받는 남자 배우인가를 설득해 낸다. 몇 장면밖에 부여받지 못한 이무생도 놀랍다. 이 배우는 《서른, 아홉》의 눈물 신 때도 느꼈지만, 기회가 오면 그 신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집중력이 엄청나다. 흥미롭게 지켜보는 건 하도영 역할의 정성일이다. 가진 것 많고, 적당히 이기적이고, 자기애 강한, '나이스한 개새끼'. 이 인물은 엄밀히 말해 김은숙 멜로드라마에서 온 변칙 캐릭터다. 동은이 펼칠 앞으로의 복수에서 커다란 패를 쥔, 지금으로서는 조커 같은 인물인데 속을 알 듯 모를 듯 긴장을 흘리는 정성일의 연기가 매력적이다.

그리고, 송혜교다. 아마 연기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걸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송혜교 자신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관건은 어떤 인물로 대중과 새롭게 만날 것인가였을 텐데 그 선택이 《더 글로리》인 건 영리한 동시에 용감했다고 본다. 그건 김은숙이라는 파트너가 있기에 가능하기도 했을 것이다. 전작 《더 킹》의 실패 후 김은숙 작가 역시 '김은숙표 멜로는 이젠 식상하다'는 시선과 싸웠던바, 그런 점에서 이 드라마는 멜로로 한 시대를 풍미한 작가와 배우의 다음을 위한 커리어적인 연대로도 보인다. 이 연대,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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