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크를 망치더라도, 선생님 전화는 꼭 받을게요 [밥 먹다가 울컥]
“박찬일이지? 지금 내가 좋은 시를 하나 읽어주려고 해요. 우리 박찬일이가 글을 쓰니까 꼭 필요한 시예요.”
바쁜 시간이었다. 바지 주머니의 전화기가 부르르 떨었다. 몇 번 끊기고 다시 걸려왔다. 하는 수 없이 전화기를 꺼냈다. 선생님이었다. 미디엄 레어의 스테이크가 웰던이 되어도 받아야 한다. 요리를 팀원에게 맡기고 손을 닦았다. 급한 전갈이 있는 건가 했다. 그랬는데, 좋은 시를 읽어주신다니. 요리사에게 저녁 8시는 밥을 버는 황금시간이다. 그걸 모르실 리 없을 텐데. 그 며칠 전에도 전화를 주셨더랬다. 그날은 “찬일이가 그때 졸업을 했지?” 하고 물으셨다. “선생님이 졸업시켜주셨잖아요” 했다.
선생님은 자주 전화하셨다. 은퇴하신 지 오래였다. 적적하실 거라 생각했다. 난 열심히 전화를 받고 대화했다. 그러던 중에 동창 친구에게서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선생님께 인지장애가 온 거 같다는 말이 있다고 했다. 난 전화를 받을 때마다, 그런 풍문이 사실인지 선생님의 기억력을 감히 테스트하려 했다. 30년도 넘은, 거쳐간 수많은 제자 중의 하나일 뿐인 나에 관한 기억을.
“선생님, 제가 공부를 잘했죠.”
“무슨 소리예요. 공부 못했어요. 출석도 잘 안 했잖아. 내가 집에 전화도 많이 했는데요.”
제자가 던진 농담에 정확한 직구로 받으셨다. 그 행간에 선생님의 병환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구나. 선생님이 아프시구나. 와병설이 사실이면 어쩔 것이고 아니면 또 어떤가. 내게 열심히 연락해서 덕담하는 선생님 마음을 그대로 받기로 했다. 스테이크가 웰던이 되더라도. 생각해보니 몇 해 전, 댁에 가서 인사를 드릴 때는 병이 있는지 느끼지 못했다.
내가 사회에 나와서 밥이라도 벌어먹고, 남에게 큰 폐 안 끼치고 사는 건 거개 학창 시절 선생님들 덕이다. 어쩌면 한 인간의 미래를 만드는 건 선생님들이다. “찬일이가 글을 따박따박 잘 써” 하셨던 초등 3학년 담임선생님, 교과서에 나온 ‘라사(羅紗)’가 양복점을 의미한다는 걸 맞혔다고 칭찬하셨던 중학교 국어 선생님 덕에 나는 글줄이라도 챙겨서 평생 벌어먹는 재주를 얻었던 것 같다. 칭찬은 사람의 미래를 만드는 마법 같은 주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유 없이 학생들에게 몽둥이를 휘두르고, 어머니들 불러서 서랍 열어놓는 양반들이 적지 않았지만 스승이라 부를 선생님도 많았다. 우리는 부모님이 낳으시고 선생님이 짓는 인생이 아니었나 감히 생각한다.
‘오랜만이네, 잘 있었어요?’
옛 기억이 떠올라 앨범을 찾았다. 선생님은 사진 속에서 특유의 표정으로 자애롭게 웃고 계셨다. ‘늘 푸른 보리처럼’ 그런 급훈이었던가. 그 시절엔 급훈을 담임선생님이 지었다. 시인다운 급훈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 나는 그다지 보리처럼 푸르지 않았던 것 같다. 툭하면 학교를 빼먹고, 학교에 나왔을 때는 엎드려 잤다. 선생님은 나날이 표정이 어두워지고 건강이 나빠지셨다. 왜 아니겠는가. 반 아이 쉰 명 중에 이른바 교내외 폭력서클 멤버가 열 명이 넘는, 아니면 나처럼 무단결석을 밥 먹듯 하던 아이들이 태반이던 학급이었다. 고등학생 주제에 거의 다 담배를 피워서, 쉬는 시간 화장실에서 폭연을 해댄 통에 동네 주민이 창문 밖으로 뿜어져 나온 연기를 보고 불난 줄 알고 화재신고를 한 일도 있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딱 한 달 만이었다. 한 달이라고 꼬집어 기억하는 건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학기 초 까맣던 내 머리가 하얗게 세었어요. 여러분 만나고 한 달 만이에요. 좀 도와주세요.”
교실은 침묵에 빠졌다. 선생님은 머리숱이 많아 백발이 더 희게 보였다. 조례가 끝나고 나랑 몇몇 아이들이 화장실에 모여서 반성과 다짐을 했던 것 같다. 앞으로 웬만하면 학교에 나오자고. 나오면 대학 가겠다고 공부하는 애들 괴롭히지 말고 뒷자리에서 조용히 엎드려 자자고. 담배 한 대를 돌려 피우면서 우리는 각오를 다졌다.
“야, 생불(生佛) 선생님 진짜 화나신 거 같다. 우리가 도와드리자.”
선생님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는데, 오죽하면 우리가 몰래 지은 별명이 생불이었을까. 선생님이 나쁜 말을 입 밖에 내는 걸 들은 적이 없다. 아주 심하게 화가 나면 이러셨다.
“지금 내가 속으로 욕을 하고 있어요. 들리죠 여러분?”
얼마 전 선생님께 문자를 드렸다. 며칠간 답이 없었다. 선생님 근황을 잘 챙기던 동창 녀석에게 물었다.
“선생님 무슨 일 없지?”
“글쎄다. 별 소식은 못 들었어.”
전화를 드려봐야겠다 싶었을 때 답장이 왔다.
‘아 오랜만이네. 잘 있었어요?’
울컥해서 잠깐 답을 못 드리고 있는데 다시 문자가 왔다.
‘찬일이 아니에요? 그럼 누구예요?’
맞아요, 선생님. 박찬일이에요. 이제 왜 전화도 안 주세요. 기름 묻은 손으로도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데요.
선생님의 긴 인생의 시간에 한 점도 안 될 내가 기억되고 있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한 번도 기쁘게 해드린 일이 없었는데. 선생님을 따라 시를 썼더라면 좋아하셨을까 여쭤봐야겠다.
옛 기억이 난다. 한번은 교무실로 날 부르셨다. 그래갖고 대학 가겠느냐, 등록금이 밀렸는데 낼 형편이 안 되느냐, 그리 물으셨다. 세상, 나는 그런 근심 어린 표정을 인생에서 다시 본 적이 없다. 상담인지 뭔지 모를 대화를 마치고 돌아서던 내게 선생님이 뭘 쑥 내밀었다. 하얀 기름종이에 싸인 햄버거였다.
1980년대 초반, 햄버거는 비싸고 귀했다. 이른바 브랜드 햄버거가 그랬다. 그 틈에 싸구려 햄버거가 시중에 많았다. 씹으면 간혹 패티가 버석거려서 닭대가리를 갈아 넣는다는 소문이 있었던. 교무실에서 교실까지 걸으며 햄버거를 씹었다. 입가에 갈색 소스를 묻히며 먹었다. 치아에 무언가 씹혔다. 그때는 아주 진지하게 선생님 속을 그만 썩이자고 다짐했던 것 같다.
박찬일 (셰프)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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