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쉬지 않고 시를 쓰는 까닭 [독서일기]

장정일 2023. 1. 15.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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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독서일기] 〈나는 나를 사랑해서 나를 혐오하고〉
서효인 지음
문학동네 펴냄
ⓒ이지영 그림

〈77편, 이 시들은〉(녹색평론사, 2022)은 197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무지개’ ‘월식’ ‘세우’가 당선되었던 김명수 시인의 열한 번째 시집이다. 신춘문예 시 당선작은 한 편이 꼽히는데, 김명수 시인은 세 편이 함께 꼽혔다. 그 가운데 한 편인 ‘세우’를 보자. “저/ 난쟁이 병정들은/ 소리도 없이 보슬비를 타고/ 어디서 어디서 내려오는가// 시방 곱게 잠이 든/ 내 누이/ 어릴 때 걸린 소아마비로/ 하반신을 못 쓰는/ 내 누이를// 꿈결과 함께 들것에 실어/ 소리도 없이/ 아주 아늑하게/ 마법의 성으로 실어가는가.”

시력 40년 넘는 시인의 한결같은 특징은 내용과 형식의 간명함이다. 지나친 간명함에는 예술지상주의라는 의심이 따라붙는다. 심사위원들이 당선작으로 세 편을 동시에 뽑은 이유는 그런 오해를 불식하기 위해서였다. 김명수의 시는 보잘것없고 하찮은 사물과 소시민을 불러내 그들의 소외와 슬픔을 위로하는 한편 사소한 존재를 긍정한다. 또 최소한의 암시(은유)를 사용하여 삶의 명암을 드러낸다. 가끔 그의 암시는 우화가 된다. ‘세우’에서는 보슬비가 소아마비에 걸린 누이를 마법의 성으로 실어가는데, 누이는 거기서 마법(소아마비)으로부터 풀려날 것이다.

이번 시집에 실려 있는 ‘강 6’은 무려 16쪽이나 된다. 이 시에서 시인은 자신을 시 쓰기로 이끈 최초의 풍경(primal scene)을 되새긴다. 한국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그해, 시인은 일곱 살이었다. 어느 날 그는 선생님으로부터 ‘시인’이라는 단어를 처음 듣는다. “선생님! 시인이 무엇인데요?”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시는 뒷냇물이 하는 말을 받아 적는 거란다. 그리고 살구꽃이 피어 있을 때의 마음을 받아 적는 거란다. 또 보리밭 위로 날아오르는 종달새를 오랫동안 바라보는 거란다.” 최초의 풍경이 사후적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들 어떤가? 우리는 거꾸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시인이 쉬지 않고 시를 쓰는 이유는 다름 아닌 최초의 풍경을 창안해내기 위해서라고. 〈77편, 이 시들은〉의 표지에 적혀 있는 ‘녹평시선 01’은 녹색평론사에서 시집이 계속해서 나온다는 말이다.

〈밀양〉(아를, 2022)은 이창동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한 영화 〈밀양〉(2007)의 각본집이다. 아들을 유괴범에게 잃은 신애(전도연)는 이후로 한 번도 아들을 잊은 적이 없다. 신애는 ‘신 64’에서 아들의 환영을 보는데, 이때는 그녀가 하나님을 영접하고 난 후다. 아들의 빈자리는 하나님도 메우지 못한다. 죽은 아들을 잊지 못하면서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용서하겠다고 나섰으니, 사달은 예비된 것이다. 그래서 종찬(송강호)이 만류하지 않았던가. “교도소 면회 가는 기… 마음으로 용서하면 고마 됐다 아입니꺼? 근데 교도소 면회까지 가가 용서한다는 말을 하고… 그럴 필요까지 있나 이거지요. 신애씨가 뭐 성자도 아이고….”

신애로부터 속물이라는 놀림을 받기까지 한 종찬의 염려가 옳았다. 교도소 면회장에서 만난 유괴범은 신애에게 용서를 받기도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다 용서받았다고 말한다. 신애는 정신을 놓아버린다. ‘신 78’에서 그녀는 심방 온 목사와 교우들에게 절규한다.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먼저 그를 용서할 수 있어요? 난 이렇게 괴로운데 그 인간은 하나님 사랑으로 용서받고 구원되었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이 대사를 마친 직후, 신애는 부엌의 싱크대에서 지렁이를 발견하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고 울음을 터뜨린다. 이창동은 재치 넘치는 각본가이자 감독이다. 교만했던 신애는 유혹하는 뱀이 되어 김 집사에게 간음의 죄를 짓게 한다.

용서를 구해야 할 당사자를 건너뛰고, 하나님과의 직거래를 통해 하나님에게 용서를 받았다고 당당하게 선언하는 유괴범의 논리는 궤변이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복음 5장 23~24절).” 하나님에게 용서를 구하기보다 먼저 잘못한 형제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서정과 속물 사이

서정시의 본령은 훼손되지 않는 유토피아에의 동경이다. 윤동주의 ‘별 헤는 밤’에 나오는 북간도는 분명 춥고 배고픈 곳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 속의 북간도는 아무것도 모자람이 없는 공간이다. 앞서 나온 ‘세우’에서도 보았듯 이 마법의 성(서정시)에서는 아무도 아프지 않다(김명수의 새 시집에 실려 있는 ‘나는 어린이 방에서 잠잔다’도 함께 보라). 이런 이유로 서정시는 현실도피를 돕는 기만술로 의심받기도 한다. 그것을 모르지 않았던 윤동주는 ‘별 헤는 밤’에서 자신의 이름을 흙으로 덮고자 했다. 서정시와 결별하고자 했다.

서효인의 〈나는 나를 사랑해서 나를 혐오하고〉(문학동네, 2022)는 흙으로 마법의 성을 꼭꼭 밟아 다진다. 서정이 움트지 못하도록. 이 시집에는 어마어마한 중력이 있다. 김치(‘김치 담그는 노인’), 함박스테이크(‘함박’), 마라탕(‘마라’), 붕어찜(‘붕어찜’), 닭갈비(‘닭의 갈비’), 소갈비(‘소의 살’), 보신탕(‘개의 소리’), 푸팟퐁커리(‘이물스러운 입맛’), 호주산 소고기(‘아빠들’) 등이 그것이다. 첫 시집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민음사, 2010)에서 세상에 대한 분노를 조절해야 했던 시인은 이제 “먹는 게 먼저다”(‘그릇은 필요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 “불룩한 아랫배가 전부”(‘로맨스’)인 사람, “어느 동네든 맛집을 두루 아는 사람”(‘선배, 페이스북 좀 그만해요’)이 되어버렸다. 그는 친구가 위암인지 폐암인지 신장암인지는 헷갈리면서도 자기가 먹은 “소고기 부위는 기가 막히게 기억”(‘코어 근육’)한다.

한국인은 “밥심”(‘붕어찜’)으로 산다. 그 “중력”이 시인으로 하여금 “온건한 데모였음에도 나는/ 빠졌다”(‘수도권은 돌풍주의보’)라고 고백하게 만든다. 여기에는 속물의 꿈만 있고 서정시의 본령은 없다. 분노를 조절하기 어려웠던 소년은 이제 “저 불쌍한 아버지를 꼭 죽여야만 합니까?”라고 반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니다 아버지가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죽이고 말고 할 것이 없다”(‘휴가지에서의 아버지’). 소년은 아버지가 되었다. 시인은 자신을 시로 이끄는 최초의 풍경을 거듭 만드는 사람이다. “나는/ 나를 사랑해서 나를 혐오하고 나는/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변명하고 토하고/ (…)/ 나 때문에 괴롭고 나는/ 나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고”(‘로맨스’)라고 말하는 출발점에서 서효인은 새로 시작한다.

장정일 (소설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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