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복종을 찬양하라” 세계의 질서 부수는 나무토막

한겨레 2023. 1. 14.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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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
<피노키오>
디즈니플러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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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에 나무토막 하나가 있었습니다.”

1881년, 이탈리아 동화작가 카를로 콜로디는 <피노키오의 모험>의 연재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썼다. 그야말로 나무토막으로부터 피노키오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피노키오를 전세계적인 캐릭터로 만든 건 월트 디즈니였다. 그는 1940년에 가족용 장편 애니메이션 <피노키오>를 선보이면서 기물(奇物)이었던 피노키오를 고양이와 금붕어를 키우는 먹고살 만한 집의 “사랑스러운 백인 소년”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 결과가 그토록 유명한 파란 눈의 피노키오다. 이 귀여운 소년이 할 줄 아는 유일한 나쁜 짓은 거짓말이었다.

나무토막이 가진 불온한 생기

하지만 콜로디의 원작 속 인형은 이와는 사뭇 달랐다. 애초에 저 나무토막부터가 문제였는데, 이 녀석은 자의식을 가지고 사람의 언어를 사용하는 기이한 존재였다. 이 별스러운 나무토막은 우연한 기회에 찢어지게 가난한 노인 제페토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마침 그는 꼭두각시를 만들어 “빵 한 조각과 포도주 한 잔”이라도 벌어먹으며 세계를 떠돌아다녀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제페토는 나무토막으로 정성스럽게 인형을 깎기 시작한다. 이 과정이 또한 괴이하다. 처음 눈알이 생겼을 때 피노키오는 제페토를 불쾌하게 째려본다. 입이 생겼을 때는 약을 올리는 듯 혓바닥을 내밀었고, 손이 생기자 제페토의 가발을 벗긴다. 그리고 마침내 다리를 얻자 통제 불능으로 온 동네를 뛰어다닌다. 그렇게 길고 험난한 피노키오의 모험이 시작되는 것이다.

애초에 콜로디는 자신의 주인공을 금방 나무에 매달아 죽여버렸다. 살려두기엔 너무 위험했던 것일까? 아니면 말썽꾸러기에게 정확한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일까? 하지만 독자들의 성화에 피노키오는 다시 살아나고 연재는 계속된다. 동화 속에서 피노키오를 어여삐 여겨 되살려주는 푸른 요정의 애정은 당시 독자들의 마음이었고, 그 열망이 결국 꼭두각시를 인간으로 만드는 마법으로까지 이어졌던 셈이다.

물론 그렇게 되기 위해 이 야생의 생명체는 훈육하는 목소리에 복종하는 법을 배우고 “노동으로 부모를 부양”하는 성실한 소년으로 거듭나야 했다. 그것이 19세기 리소르지멘토(이탈리아 통일운동) 이후 이탈리아의 엘리트들이 꿈꿨던 “새로운 이탈리아인”의 자질이었다(<이탈리아어문학> 제58호 ‘피노키오와 리소르지멘토’).

이런 이야기가 기예르모 델 토로의 손을 거쳐 재탄생했다. 익숙한 틀에 갇혀 있지 않다는 이유로 한 사회가 혐오하고 두려워하는 온갖 불량한 것들을 사랑하는 이 문제적 감독은 “어떻게 하면 남자아이를 길들일 것인가?”라는 콜로디와 디즈니의 관심사로부터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원작의 나무토막이 가지고 있었던 불온한 생기를 꽉 쥔 채 완전히 다른 질문을 던진다. 그건 바로 델 토로 본인이 말했던 것처럼 “어떻게 하면 복종을 찬양하는 대신 불복종을 축하할 것인가”다.

이탈리아의 한 작은 마을. 제페토는 늦둥이 아들 카를로와 사랑으로 충만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이 불러온 죽음의 그림자가 부자에게도 닥쳐온다. 제페토는 아들을 잃고 20년을 술과 눈물로 흘려보낸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어느 날 밤, 만취한 상태로 아들을 닮은 나무 인형을 만들다 잠이 든다. 그런 그를 불쌍히 여긴 나무의 정령은 인형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주고 피노키오라 이름한다.

연결된 실도 없이, 자율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설칠 수 있는 꼭두각시의 등장에 놀란 마을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 사건을 해석하고 받아들인다. 성당에 있던 중년 여성은 피노키오에게 “악마”라고 외친다. 제페토는 그를 죽은 아들의 대체물로 바라본다. 마침 그 마을에 머물고 있던 서커스 단장에게 피노키오는 돈벌이 수단이다. 그리고 광적인 파시스트인 포데스타는 이 어린 소년이 “완벽한 이탈리아 군인”이라 믿는다. 불사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기대에 따라 피노키오는 이리저리 떠돌게 된다.

콜로디가 나열했던 수많은 모험 장소 중에서 디즈니가 가장 공들여 재현하기로 마음먹었던 곳은 바로 ‘쾌락의 섬’이었다. 온통 장난감과 먹고 마실 거리로 가득 찬 이곳에서 아이들은 시간을 잊고 인생을 즐긴다. 결과는 당나귀가 되어 채찍질을 맞으며 팔려나가게 되는 것. 디즈니식 변신 이야기는 ‘못된 아이’가 어떤 일을 당하게 되는지에 대한 섬뜩한 가르침을 남긴다. 델 토로는 쾌락의 섬을 들어내고 그 자리에 소년병 훈련소를 배치했다. 포데스타는 그곳에서 자신의 아들 캔들윅과 함께 피노키오를 ‘위대한 파시스트 군인’으로 양성하고자 한다.

디즈니플러스 제공

캔들윅이 아버지에게 맞섰을 때

쾌락의 섬이 소년병 훈련소가 되고, 아이들이 나태와 맥주가 아니라 경쟁과 폭격에 의해 위험으로 내몰리는 자리에서, 델 토로는 자신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펼쳐낼 인물을 무대 위에 올리고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그건 피노키오가 아니라 피노키오를 만났기 때문에 다른 세상을 꿈꾸게 된 소년 캔들윅이다.

훈련소 에피소드의 클라이맥스. 포데스타는 캔들윅에게 총으로 피노키오를 쏘라고 강요한다. 친구에 대한 사사로운 감정보다는 조국에 헌신하는 강인한 군인의 마음을 ‘장착’하라는 요구다. 하지만 캔들윅은 그런 아버지에게 맞선다. “늘 아버지를 기쁘게 하려고 노력했어요. 하지만 이젠 안 해요.” 이 장면은 생명을 짓밟는 폭력을 온갖 그럴듯한 명분과 시적 언어로 포장해온 아버지를 살해하는 살부의 순간이자, 아버지의 영토로부터 탈주한 소년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폭력을 배우기를 거부하는 빛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델 토로의 판본에서 무언가 다른 것으로 전환되는 건 피노키오가 아니라 제페토와 캔들윅, 그리고 이 지면에 다 쓰진 못했지만 서커스 단장의 수하였던 원숭이 스파차투라다. 그런 의미에서 피노키오는 처음 콜로디가 연재를 시작할 때 등장했던 세계의 질서를 망가트리는 나무토막, 그 기물의 본모습을 되찾았다. 콜로디는 그를 나무에 매달아버렸고, 디즈니는 순수함과 선량함으로 해석되는 파란 눈을 붙여주었지만, 델 토로는 그에게 자신의 속도에 따라 성장하면서 동료와 가족을 만들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선사했다.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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