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디자인은 기본, 기본만이 살아남는다”

한겨레 2023. 1. 14.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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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훈의 낯선 사람][한겨레S] 김도훈의 낯선 사람
‘제품 디자인계의 스티브 잡스’ 디터 람스
최소한의 디자인을 추구했던 디터 람스는 산업 디자인계에서 ‘미니멀리즘의 교주’로 일컬어진다. 디터 람스 페이스북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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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디터 람스다. 이 무슨 산업 디자인 용품 같은 이름은 독일 산업 디자이너 이름이다. 이미 디터 람스라는 이름을 알고 글을 읽기 시작한, 디자인 역사 좀 안다고 자부하는 독자라면 ‘디터 람스’라는 이름 앞에 무슨 이런 쓸데없는 설명이 많냐며 불평하고 있을 것이다. 디터 람스는 산업 디자인의 역사에서는 이미 독보적인 인물이다. ‘낯선 사람’에 어울리는 인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일간지에 칼럼을 연재하다 보니 깨달은 게 있다. 모두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인물도 의외로 사람들은 잘 모른다. 진짜다.

디터 람스를 모르는 독자에게 그를 한마디로 다시 설명해보겠다. ‘산업 디자인의 스티브 잡스’다. 아이고 지겨워라, 언제까지 ‘무슨 무슨 분야의 스티브 잡스’라는 말을 쓸 것인가. 하지만 스티브 잡스와 디터 람스는 의외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인물이다. 애플이 처음으로 생산한 아이팟(iPod)이 증거다. 애플이 2001년 아이팟을 공개하자 세상이 뒤집어졌다. 하드디스크형 엠피(MP)3의 시대였다. 스마트폰도 없었고 스트리밍 서비스도 없던 시절이다.

애플 디자인에 영감을 줬던 그

사람들을 놀라게 한 건 디자인이었다. 손가락으로 돌리는 ‘클릭휠’은 한번도 본 적 없는 디자인이었다. 편했다. 간결했다. 아름다웠다. 나는 2003년에 아이팟 3세대를 샀다. 버튼에는 빨간 백라이트가 들어오고 화면은 파란색 백라이트가 들어왔다. 나는 휠을 돌리면서 ‘이보다 아름다운 전자제품을 만드는 건 힘든 일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름다운 건 모두가 탐한다. 나의 3세대 아이팟은 2004년 4세대 아이팟이 출시된 지 몇달 되지 않아 도둑맞았다. 회사 책상 위에 올려뒀는데 사라져버렸다. 지금이라도 훔쳐 간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말하고 싶다. 3세대 아이팟은 디자인 역사상 최고의 걸작 중 하나입니다. 최신형 아이폰을 사드릴 테니 제발 돌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아이팟을 디자인한 사람은 또 다른 ‘낯선 사람’으로 소개할 만한 산업 디자이너 조너선 아이브다. 오히려 여러분은 디터 람스보다 조너선 아이브라는 이름에 더 익숙할 것이다. 그는 1992년 애플에 입사해 스티브 잡스와 함께 애플의 전성기를 열어젖힌 사람이다. 대개의 산업 디자인 프로세스는 다음과 같다. 엔지니어가 기기를 설계하면 디자이너가 그걸 기반으로 제품을 디자인한다. 잡스와 아이브는 그걸 뒤집었다. 디자이너가 제품 디자인 설계에 깊이 관여하도록 만들었다. 아이팟과 아이폰의 역사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요즘 애플 디자인이 영 예전만 못하다고? 그게 다 스티브 잡스가 죽고 조너선 아이브가 애플을 퇴사한 탓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전성기 애플 디자인은 스티브 잡스와 조너선 아이브 외 디터 람스가 깊이 관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가 애플로부터 돈을 받고 뭘 디자인한 적은 없다. 하지만 조너선 아이브가 일하던 시기 애플이 내놓은 걸작은 디터 람스가 디자인을 지휘한 독일 회사 ‘브라운’(Braun) 제품을 창의적으로 카피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를테면 아이팟은 디터 람스가 디자인한 브라운의 ‘T3 포켓 라디오’와 거의 똑같이 생겼다.

당연한 일이다. 디터 람스는 ‘미니멀리즘 디자인’의 교주다. 조너선 아이브와 스티브 잡스 역시 사용자의 경험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가장 미니멀한 제품을 내놓는 것이 목표였다. 산업 디자인이 미니멀리즘을 구현하려면 결국 디터 람스로 돌아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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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터 람스의 ‘좋은 디자인 십계명’

디터 람스는 1932년 독일 비스바덴에서 태어났다. 유년기에 2차대전을 겪은 건 오히려 행운이었다. 전쟁은 끝났다. 나치도 끝났다. 독일은 끝나지 않았다. 전후 10년 만에 경제 호황을 맞이한 독일은 1950년대부터 다시 세계가 주목하는 전자제품 생산국이 됐다. 1950년대 이후 ‘독일제'는 일제, 미제와 함께 세계를 휩쓸었다. 그 중심에는 전기면도기를 쓰는 사람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회사 ‘브라운’이 있었다.

미술, 공예, 건축을 가르치는 테크니컬 아트 컬리지에서 공부하던 디터 람스는 1955년 브라운의 구인 광고를 보고 입사했다. 원래 건축가를 꿈꾸던 디터 람스는 브라운에서 라디오, 면도기, 턴테이블, 계산기 등 다양한 제품을 디자인하면서 산업 디자이너가 됐다. 그리고 1995년까지 40년에 걸쳐 브라운의 수석 디자이너로 일했다.

그가 1960~70년대에 디자인한 제품들은 당대에도 인기가 있었다. 시대를 뛰어넘은 세련된 디자인 덕분이었다. 만약 당신이 구글에 디터 람스라는 이름을 검색한다면 가장 먼저 나오는 정보는 ‘디터 람스의 좋은 디자인 십계명'일 것이다. 내친김에 여기서도 인용을 좀 해보자. 1. 좋은 디자인은 혁신적이다. 2. 좋은 디자인은 제품을 유용하게 만든다. 3. 좋은 디자인은 심미적이다. 4. 좋은 디자인은 제품을 잘 이해할 수 있게 한다. 5. 좋은 디자인은 장식적이지 않다. 6. 좋은 디자인은 정직하다. 7. 좋은 디자인은 영속적이다. 8. 좋은 디자인은 마지막 디테일까지 철저하다. 9. 좋은 디자인은 환경친화적이다. 10. 좋은 디자인은 최소한의 디자인이다.

모두가 디터 람스의 원칙을 따를 필요는 없다. 디자인에는 미니멀리즘 말고도 많은 사조가 있다. 모든 디자인 사조는 각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물론 후카사와 나오토, 재스퍼 모리슨, 조너선 아이브를 좋아하는 미니멀리즘 디자인의 광적인 팬이라면 생각이 다를 수도 있다. 디터 람스를 좋아하는 사람이 지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돈도 많이 버는 프랑스의 스타 디자이너 필리프 스타르크를 좋아할 리는 없다. 필리프 스타르크는 맥시멀리스트다. 모든 제품이 컬러풀하고 화려하고 키치하다. 나는 디터 람스의 제품으로 집을 다 채울 수는 있지만 필리프 스타르크의 제품으로 채울 수는 없다. 그건 시각적으로 정신 나간 1980년대와 1990년대 디자인의 무덤이 될 것이다.

사실 디터 람스는 한동안 잊힌 이름이었다. 1970년대 이후 사람들은 좀 더 개성이 있는 제품 디자인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색채도 모양도 다른 회사의 제품과는 달라야 했다. 특별해야 했다. 디터 람스가 디자인한 브라운의 제품들은 지나치게 얌전한 모더니즘 시대의 유물처럼 받아들여졌다. 고전이지만 새롭지는 않았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부르짖는 시대에 디터 람스 디자인은 지나치게 청교도적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디자이너와 많은 사조가 불타오르고 사라진 뒤에도 디터 람스는 살아남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좋은 디자인은 최소한의 디자인이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디자인은 기본이다. 기본은 영원히 살아남는다.

디터 람스의 부활은 애플이 주도한 것이 맞다. 조너선 아이브의 애플 제품들이 디터 람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이야기들이 나오면서 새로운 세대가 디터 람스를 재발견하기 시작했다. 그가 1960~70년대 디자인한 브라운 제품들도 고가에 거래되기 시작했다. 독자 중 많은 분들이 당근마켓이나 중고나라에서 투명 아크릴 상판이 있는 반세기 전 하얀 턴테이블이 수백만원에 거래되는 걸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백설공주의 관'이라 불리는 브라운의 턴테이블 SK4는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걸작이다. 얼마 전 친구가 이 턴테이블을 구입했을 때 나는 부러움에 떨다 디터 람스 이름을 외치며 울었다. 이건 곧 나도 사게 되리라는 말이다. 지금 사진을 검색하는 당신은 나의 경쟁자가 될 것이다. ‘백설공주의 관'을 보고도 지갑을 열지 않을 도리는 거의 없으니까 말이다.

디터 람스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분들을 위해 얼마 전 2018년 다큐멘터리 <디터 람스>(Rams)가 공개됐다. 넷플릭스와 왓챠에 올라왔으니 클릭 한번만 하면 된다. 뮤지션 브라이언 이노가 음악을 담당한, 아주 람스스러운 람스 영화다. 당연히 직접 출연하는 디터 람스는 오래전 디자인 십계명을 모두 포괄하는 최종 원칙 하나를 더 말한다. ‘Less, but better’다. 최소한의 디자인을 하라, 그러나 더 낫게 하라는 이야기다. 최소한의 디자인으로 인간의 삶을 더 낫게 만드는 제품을 만들라는 잠언이다.

지난해 5월5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응용미술박물관(MAK)에서 디터 람스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모든 것은 기본으로

그렇다면 ‘나은 것’은 무엇인가. 그건 아마도 이런 게 아닐까. 나에게 한국 산업 디자인의 암흑시대는 2000년대와 2010년대 초반 즈음으로 기억된다. 도대체 누가 냉장고에 꽃을 그려 넣는 것이 아름답다고 결정한 건지는 모르겠다. 한번 가전 세계로 들어온 꽃다발은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백색가전이야말로 기본이라 생각했던 나는 하이마트에서 꽃무늬가 아닌 최신 냉장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창고에 처박혀 있던 구형 모델을 겨우 구했다. 다행이다. 안심이다. 그 시대는 끝났다. 이제 누구도 냉장고에 꽃을 그려 넣지 않을 것이라 나는 확신할 수 있다. 바로 이런 것이 ‘나은 것’이다.

요즘은 몬드리안 스타일로 색채 패널을 넣거나 앱으로 색상을 바꿀 수 있는 냉장고 디자인이 유행이다. 헛되도다. 만약 지금 어떤 냉장고를 살까 망설이는 독자가 있다면 디터 람스의 잠언을 잊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결국 모든 것은 기본으로 돌아온다. 물론, 내가 삼성이나 엘지(LG) 디자인 상무라면 지금 당장 디터 람스와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하라고 소리치고 있을 것이다. 

영화 잡지 <씨네21> 기자와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을 했다. 사람·영화·도시·옷·물건·정치까지 관심 닿지 않는 곳이 드문 그가 세심한 눈길로 읽어낸 인물평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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