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가 어디서 배웠는지도 모를 말을 할 때 부모는 당황한다. 아이가 혹시 부적절한 언어를 쓰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건 아닌지, 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 과도한 자극이 주어지는 건 아닌지 신경 쓰게 된다. 아이가 바른 길로 성장하게 도와줄 수 있는 친구와 교사를 만나길 바라는 마음에 부모는 때로 무리하기도 한다. 친구에게 본인 자녀를 만나지 말라고 하거나 교사에게 바른 가르침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시도때도 없이 보내는 것이다.
‘우리의 20세기’(2016)는 남편과 이혼한 뒤 자식을 바르게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성의 이야기다. 그녀는 자녀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선 엄마 혼자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본인 집에 세들어 사는 예술가 여성, 그리고 아들의 또래 이성에게 자녀의 조언자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하게 되는 계기다. 그러나 어느 날 여성주의를 접한 아들이 페미니스트 시각을 바탕으로 엄마 삶을 판단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고, 엄마는 아들에게 조언하는 여성이 악영향을 끼치는 건 아닌지 걱정하게 된다.
기절놀이로 응급실 간 아들, 나 혼자 키울 수 있을까
이야기의 배경은 1979년 미국 샌터바버라다. 남편과 이혼한 도로시 필즈(아네트 베닝)는 아들 제이미(루카스 제이드 주먼)와 둘이 가정을 꾸려 살아간다. 싱글맘으로 아들을 키우기가 지금보다 더 녹록지 않은 시기였지만 도로시는 명랑하고 사교적이다. 어느 날 자신의 차에 발생한 화재를 수습해준 소방관을 파티에 초대할 정도다. 본인 서명을 위조해 학교에 조퇴서를 제출한 아들을 혼내는 대신 정교한 위조 실력을 칭찬할 만큼 쿨한 엄마이기도 하다. 세입자들을 들이고 사는 걸로 봤을 땐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도로시는 아들 교육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자기가 낳은 자식인데도 속을 모르겠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점점 늘어서다. 아들은 평상시엔 도로시에게 다정하게 대하다가도 한번씩 돌발행동을 한다. 응급실에 실려간 사건이 그렇다. 제이미는 친구들과 기절 놀이를 하다가 의식을 되찾는 데 30분이나 걸려 엄마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하지만 자신을 꾸짖는 엄마에게 제이미는 외려 “엄마는 왜 죽으려고 담배를 피우냐” “슬프고 외로우면서 왜 맨날 괜찮다고 하냐”고 반문한다. 도로시는 자기 혼자 아들을 교육하는 데는 역부족이라고 결론 짓는다.
“너희가 걔를 도와줘” 두 여성에게 조언자 역할 부탁한 엄마
도로시는 두 여성에게 아들의 조언자 역할을 해줄 것을 부탁한다. 한 명은 자신의 집에 세들어 사는 이십대 사진작가 애비(그레타 거윅), 또 다른 한 명은 제이미의 오랜 친구 줄리(엘르 패닝)다. 도로시는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을 알려달라”며 “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자신의 한계를 고백한다. “남자를 키우는 데는 남자가 필요하지 않냐”고 묻는 둘에게 도로시는 두 사람만한 적임자가 없다고 재차 강조한다. 예술적 감각이 있는 애비가 아들의 견문을 넓혀주고, 아들과 누구보다도 가까운 줄리가 그에게 공감해주면 제이미가 성장하는 데 필요한 양분이 충분히 공급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 관계는 엄마가 애초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제이미를 성장시킨다. 제이미가 두 사람에게서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음으로써 성숙해지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을 돕는 과정에서 보다 어른스러워지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진작가인 애비가 자궁경부암 수술 결과를 통보 받으러 산부인과에 간 날, 제이미는 그저 같이 있어줌으로써 남을 위로할 수 있다는 걸 배운다. 동행하는 것만으로도 타인에게 위안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이다. 해결책을 줘야 한단 강박감은 내려놔도 괜찮다. 사실 대부분 고민의 답은 당사자 내면에 있기에 주변 사람은 그가 자기 안의 솔루션을 찾기까지 옆에서 지켜봐주면 충분할 때가 많은 것이다.
제이미는 절친한 이성 친구인 줄리와의 관계를 통해서는 상대가 원하는 만큼만 다가가는 법을 배운다. 줄리는 제이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연인으로 발전하는 것을 경계한다. 매일 밤 제이미 방을 찾아와 자면서도 잠자리는 갖지 않는다. 그러나 제이미는 세상엔 그런 남녀 관계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줄리와 친구 사이를 유지한다. 다른 남자와의 관계에서 임신했을까 봐 걱정하는 줄리를 위해 임신 테스트기를 사다주고, 음성이 나왔을 때 함께 기뻐해준다. 남들 눈엔 호구로 보일지라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일반적인 남녀 관계를 기준으로 삼는 대신 두 사람만의 특수한 관계에 충실하기로 한 것이다.
아들은 엄마에게 페미니즘 책을 읽어줬다 … “날 가르치려는 거니”
그러나 엄마는 당황하게 되는데 그들의 관계가 아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느끼면서다. 아들이 모친 앞에서 ‘쓸모없는 채로 살아 있음이 아프다’란 책을 읽어줄 때 엄마는 다소간 수치심을 받는다. 아들이 읽어준 부분은 나이 든 여성이 자기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지에 대해 얘기하는 챕터다. 엄마는 이제 막 페미니즘을 공부한 아들이 자신을 계몽하려 든다는 인상을 받았는지 모른다. “그걸 읽었다고 날 더 잘 아는 것 같아? 난 책 없어도 날 잘 안다”고 말하는 엄마에게 아들은 사과한다.
엄마는 아들에게 페미니즘을 소개해준 애비에게 “도와주려는 건 정말 고마운데 너무 멀리까지 가는 것 같다”고 우려의 말을 전한다. 엄마는 “겨우 15살인데 강경한 페미니즘을 소개하는 게 어떻게 도움이 되느냐”며 “걔한테 어떤 영향이 가는지 알기나 하냐”고 진지한 걱정을 한다. 이에 애비는 “좋은 남자가 되는 데 도움이 된다”며 “내가 보기엔 괜찮아 보인다”고 반박한다.
불완전한 우리 삶이 불완전한 누군가에겐 위로가 된다
이 영화는 자전적 경험을 주로 풀어온 마이크 밀스 감독의 작품이다. ‘비기너스’(아래 씨네프레소 3회 링크 참조)에서 아버지와의 일화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면 이번엔 어머니와의 관계가 중심이다. 그는 주로 관찰자의 위치에서 주변 사람 삶을 들여다보며 거기에서 얻은 깨달음을 전한다. 75세 아버지가 커밍아웃한 이야기인 ‘비기너스’를 통해서는 한 사람이 사랑하며 사는 데 있어 롤모델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말했다면, ‘우리의 20세기’를 통해서는 주인공의 성장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세 여자의 삶을 바라보며 인간이 서로를 어떻게 성숙시키는지를 보여준다. 원제가 ‘20th Century Women’(20세기 여인들)인 이 영화에선 세 여성의 삶이 큰 비중으로 그려진다.
이후의 전개를 봤을 때, 애비는 제이미에게 페미니스트로서 영향을 미치려는 노력을 그만두지 않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성을 주제로 식탁에서 이뤄지는 자유로운 대화가 이를 짐작게 한다. 그러나 아마 엄마의 걱정처럼 제이미가 강성 페미니즘을 너무 일찍 받아들이며 혼란에 빠진다든지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숱한 독서와 문화 생활로 성장해온 제이미는 어떤 것을 접하든지 자기 식으로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엄마가 자신을 가르치려 들지 말라며 불쾌감을 표현했을 때, 바로 수긍할 정도로 균형 감각도 있다. 그는 남에게 깨달음을 강요하지 않으며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할 줄 아는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았을까.
‘아들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칠 사람들만 주변에 두겠다’는 엄마의 노력은 사실 실현 불가능한 목표였다. 그 사람들도 남에게 자신이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모르는 불완전한 존재일 뿐이기 때문이다. 아들에게 좋은 것만 주려고 했던 엄마 역시 마찬가지였지 않은가. 두 여성과 제이미는 서로 위로와 공감으로 지지해주기도 하지만, 때로 상대 마음을 다치게 하기도 했다. 아들은 엄마가 바라지 않았던 자극에 두 여성을 통해 노출되고, 생각지 못했던 방향으로 성장해간다.
그렇기에 아들의 바른 성장을 위해 두 여성을 붙였던 엄마의 노력은 실패이면서 성공이다. 두 여성과의 사이에서 제이미가 적절한 응원과 격려, 위로만을 주고받게 하는 건 실패했지만, 제이미는 엄마가 예상치도 못했던 자극과 상처를 받으며 다른 존재를 품을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한 것이다. 엄마는 행복하지 않게 살았던 자신이 아들을 교육하기엔 부족하다고 느꼈지만, 사실 아들은 엄마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겨왔다. 우리가 부모를 좋아하는 이유가 그들이 행복하고 완벽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듯, 불완전하고 부족한 우리 모습이 누군가를 위로하고 성장시키는 양분이 될 것이다.
아래 기자 페이지 ‘구독’ 버튼을 누르면 더 많은 영화와 드라마 리뷰를 볼 수 있습니다. ‘씨네프레소’는 매주 토요일 연재합니다. 리뷰를 통해 같이 얘기해보고 싶은 작품이 있으면 댓글이나 이메일로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