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비어 있어 더 가득 찬 '빈공간'.. "원도심, 이런 미술장터를 봤나"
23명 작가, 95점 출품.. 최대 '100만 원' 상한가 책정
예술문화계 '비수기' 극복 취지.. "자생적 활로 마련"
관람객 등과 소통·교류 확대.. 다양성 실험의 장 승화
# 1년 사이 '빈공간'은 더 '비어'버렸습니다.
무엇을 품더라도 넘치지 않을만큼 여유로움이 더해져, 문을 열고 한 발 내딛는 순간 함께 공간으로 섞입니다. 그래서일까, 23명의 섬 안팎의 작가들 95점의 작품이 한데 모였는데도 넉넉합니다.
어디에서나 쉽게 만날 수 없는 시각예술은 보는 이들에게 감동과 즐거움을 선사하는 법. 더구나 이들이 동시대 미술계에서도 주목받는, 혹은 유망한 작가들이라 할 때 더 눈길이 갈수 있건만, 그렇다고 해서 작품마다 사전 정보나 현장 설명 (혹은 가격), 이른바 캡션(작품의 설명이나 표기)은 찾아볼래야 보이지 않습니다.
다음 달 15일까지 제주시 원도심 '아트스페이스 빈공간'에서 진행되는 '제1회 빈공간 아트페어'입니다.
■ '캡션' 없는 아트페어.. "작품과 나의 대화"
"작가나 혹은 미술 관계자들은 '척보면 척'식으로 작품만 봐도 누구인지 알수 있겠지만 일반인들은 대부분 작품만 봐선 구분이 어렵다. 때문에 전시장에서는 '캡션'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며 "작가가 누군지, 아니면 작품 가격 등을 보고 '유명하니까' 혹은 '비싸니까' 식으로 미리 가치를 판단하는 오류를 피하고, 편하게 둘러보며 '마음'으로 작품을 접해 보도록 하자는 취지"이라고 이상홍 작가(시각예술가·아트스페이스 빈공간 대표)는 설명했습니다.
정말 작품을 구입하고 싶을 때 결정하면, 작가에 대한 소개와 작품에 대한 정보를 받을 수 있는 방식입니다.
물론 알려면 충분히 알수도 있겠지만, 아트페어에 대한 관심과 함께 심미안을 키우고 싶다면 경험해볼만한 일종의 '블라인드' 마켓인 셈입니다.
복합문화공간 '아트스페이스 빈공간'을 시작하면서 작업과 소통의 장을 확장하고 나섰던 이 작가의 첫 포부처럼, 방문한 이들에게 문턱은 낮추되 미리 눈높이를 맞추거나 가이드를 제시하진 않겠다는 자기 나름의 의도를 반영한 결과입니다.
■ 관행적 지원시스템 의존 탈피해야.. "자생력 구축 차원"
2021년 가을, 제주시 목관아 인근 고택을 빌려 지난해 봄까지 공들여 개조를 마친 끝에 문을 연 '아트스페이스 빈공간'의 첫 '아트페어'입니다.
별도 오픈식 없이 내일(15일) 시작해 다음 달 15일까지 한 달 동안 이어집니다.
대형 갤러리나 요즘 트렌드인 호텔, 그렇다고 공모를 거쳐 선정하거나 여러 갤러리들이 참여하는 것도 아닌 개별 작가군을 일일이 접촉하며 일궈낸 성과라 더 눈길을 끕니다.
고착화된 예술지원시스템과, 그 생태계에 대한 자각과 반발이 출발점이 됐습니다.
이상홍 작가는 "특정 예술이나 작가군 모두 그렇다고 할 수 없겠지만, 통상적으로 예술 부문의 작가나 단체의 경우 '어떤 지원사업이 떴나' 하고 해당 기관의 누리집을 들락거리며 자신이나 자기 단체가 신청할 만한 사업이 있는지 수시로 들여다보곤 한다"며 "예술지원시스템 패턴이 1, 2월은 보통 공모를 받고 이후 3, 4월 정도 발표를 하는데 그때까지는 작가 등에겐 '보릿고개'나 마찬가지인 시기가 될 수 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지원사업을 신청하고서는 늦게는 6월 상반기까지, 한참 기다리고 또 신청하고 기다리는 날이 이어지고 발표가 날 때까지는 좀처럼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는 날이 반복되는데서 어느 때보다 활로가 절실해보였습니다.
그런 지원시스템의 한계성을 감안하면, 작품 판로라도 수월해야 하는데 이 역시 쉽지 않다는데서 답은 '아트페어'란 결론으로 이어졌습니다.
"하고 싶은 작업을 하고 또 원활하게 작품을 판매할수 있어야 하지만 작가 개개인이 시장 논리에 수긍하며 접근한다는게 말처럼 쉬운 문제는 아니"라며 "더구나 늘 작품이 잘 팔린다는 보장도 할수 없는만큼, 보다 광범하게 또 세부적으로 관람객 혹은 구매자들과 연결하고, 접촉할수 있는 기회 그리고 장을 마련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개최 배경을 정리했습니다.
■ 23명 작가 95점 출시.. 작품가격 "최대 100만 원 상한선"
이 작가는 "아무런 지원이나 보장을 약속하지 못하면서도, 종전 전시 작가들이나 아는 분들에게 일일이 부탁을 드렸다"며 "신진 작가는 물론 인지도 있는 작가들까지 다양한 분들이 직접 포장하고 우체국택배로 보내오는 등 호응이 이어져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됐다"고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계묘년 첫 전시이자 실험적인 아트마켓인 '빈공간 아트페어'엔 제주와 다른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20대에서 60대까지 시각예술 부문의 작가 23명이 드로잉과 회화, 사진, 입체 등 95점의 작품으로 참여합니다.
작품은 모두 현장에서 구매 가능하며, 판매가는 최대 100만 원 이하로 책정했습니다.
작가들의 '보릿고개' 나기에 보탬을 주자면서, 정작 구매 문턱을 높여선 안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 작가는 "작품 판매도 좋지만, 판매 이전에 작품을 관객들한테 알릴 수 있는 기회를 더 만들어보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기획한 아트페어"라며 "참여하고 싶지만 여러 사정상 참여하지 못한 작가들도 적지 않아 내년에는 가격 등 여러 기준을 조정하면서 더 많은 작가군을 포용하고, 매년 연초에 지난해를 돌아보고 새로운 1년을 계획하는 시점에는 정기적인 '페어' 형식의 아트마켓을 지속 개최해 보려 한다"고 앞으로 계획을 밝혔습니다.
■ 2월 15일까지 전시.. "사전예약 후 관람"
'아트스페이스 빈공간'은 지난해 3월 '빈공간 오픈스튜디오'를 시작으로 4개의 초대기획전시와 연극 공연 1회를 진행하고 '박도연', '오만가지공방', '고닥', '이지유', '박숙은', '김승민' 등 재단 지원 작가의 개인전과 그룹전을 다수 개최했습니다.
1년여 동안, '빈공간'을 거점으로 제주 안팎의 많은 작가들의 다양한 현대미술을 전시한 이상홍 작가는, '복합' 공간이란 취지를 살려 전시장 옆 '빵공간' 운영에 나섰고 주민들과 함께하는 예술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삼춘도 좀 놀자', '이작가와 끼니', '이작가와 희곡읽기'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앞서 2019년부터 샛물골 마당집에서 시작한 '이작가와 끼니'는 카레가 가미돼 '카레 드로잉' 프로그램으로 온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아트페어는 다음 달 15일까지 전시기간, 오전 1시부터 오후 6시까지 사전 예약을 통해 관람 가능합니다.
※ 참여 작가(23명)
고정원, 김승민, 김윤섭, 김 을, 김태헌, 김현성, 김현수, 문정민, 박정근, 박해빈, 신선우, 이상홍, 이세린, 이소담, 이승현, 이진아, 장고운, 장예린, 정정엽, 최민솔, 최혜주, 한용환, 한 진
대표 작가는 아래와 같고, 간략한 소개가 함께 합니다.
▶김 을 : 주얼리 디자인 전공으로 1980년대 중반 회화로 전향해 금호갤러리(1994)를 시작으로 OCI미슬관(2022) 전시까지 30회 개인전을 가졌습니다. 드로잉 중심으로 회화와 입체 그리고 오브제와 인스털레이션 등을 작업하고 있습니다. 2016년 올해의 작가상과 2018년 이중섭 미술상을 수상했습니다.
▶박정근 : 바다가 없는 내륙의 깊은 산골에서 나고 자란 사진가입니다. 제주로 들어와 카메라를 든 지 10년이 다 되어갑니다. 해녀, 4·3, 굿 등을 통해 내밀한 제주의 사연을 만나고 있습니다. 아직 제주가 어렵다 말하는 작가입니다.
▶놀子 김태헌 : 경원대학교에서 그림을 전공했습니다. 작업 스타일을 없애며 그림과 함께 삶을 확장 중입니다. 세상에 대한 생각들이 모이면 책을 만들고 사람들과 느리게 소통하는 작가입니다. 성곡미술관 '내일의 작가'(1998) 등 20회 개인전을 가졌습니다.
▶박해빈 :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 예술사, 전문사(평면조형) 과정을 졸업했습니다. 스페이스 몸 미술관, 갤러리 도스, 우민아트센터 '프로젝트 스페이스 우민' 작가로 선정돼 전시를 진행했습니다. 2017년부터 현재까지 개인 작업 공간이자 윈도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빈공간'을 기획·운영 중입니다. 지난해 제주시 원도심에 '아트스페이스 빈공간'을 열고 다양한 문화 기획과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한 진 : 지난 2009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올해까지 개인전 4회, 다수 그룹전에 참여했습니다. 제주 풍경을 바탕으로 첫 개인전을 갖고 제주와 서울 도심 풍경을 재구성한 '두 개의 섬', '부유하는 섬' 시리즈와 과거와 현재, 물리적 공간과 가상 공간을 재구성한 '일상공존' 시리즈 등 확장되고 변형되는 풍경을 통해 '우리가 본다는 것'에 대해 고찰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김윤섭 : 주로 회화 작업을 하는 작가입니다. 이미지의 환영성과 형식성을, 서사를 배제한채 모호한 지점으로 끌고 가려는 방법론을 갖고 있다(스스로) 밝힙니다. 드로잉 만으로 완결되는, 각각 회화의 소재에 대한 방법론을 찾기 위해 실험적으로 진행한 작품 3개를 선보입니다.
▶정정엽 : 지난 1980년대부터 거대담론과 미시담론을 포괄한 작품과 예술적 실천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집사람' 시리즈와 '얼굴풍경', '최초의 만찬', '조용한 소란', '걷는 달' 등 작업으로 여성노동과 동시대 여성들의 삶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2018년 제4회 이응노 미술상, 2022년 34회 이중섭 미술상을 수상했습니다.
JIBS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기자
Copyright © JIB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