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반가워서 차마 하지 못한 말…”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명작이 아니다[정양환의 데이트리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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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를 통해 세상을 보려 합니다. 1965년 비틀즈 싱글 곡 '데이트리퍼(Day tripper)'는 "당일치기 여행자"를 일컫습니다. 만화를 본다는 건 잠깐 일상을 벗어나는 여행이니까요. 브라질 그래픽노블 '데이트리퍼'도 영감을 줬습니다. 이 만화엔 삶을 담는 소설가를 평생 꿈꾸지만, 실상은 죽음을 알리는 부고(訃告) 담당기자가 나옵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 우리네 인생과 무척 닮지 않았나요. |
최고의 팬 미팅이었다. 허나 무조건 ‘엄지 척’할 짜임새는 아니었다.
팬들이 애타게 기다렸던 작품. 일본 애니메이션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4일 국내 개봉했다. 1996년 만화 연재를 마쳤으니 장장 26년만. 12일 기준 누적 관객 54만 명을 넘어섰다. 좌석판매율은 ‘아바타: 물의 길’을 제치고 1위에 오르다니. 기대보다 더 화끈한 반응. 우리가 이렇게나 슬램덩크를 사랑하는지 적잖이 놀란다.
실제로 원작만화는 팬층이 두텁기로 유명하다. ‘슬램덩크’는 일본에서 1억7000만 부 이상 팔리며 역대 스포츠만화 판매순위 1위에 올라있다. 국내 역시 지금껏 1450만 부 이상 판매됐다. 1993~96년 일본 아사히TV에서 방영한 애니메이션시리즈는 “원작을 망쳤다“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평균시청률 15.3%의 성공을 거뒀다.
그런 추억의 힘은 가공할 정도다. 스크린 앞에 앉아보면 안다. 불 꺼지는 순간 무장해제다. 연필로 스케치하듯 북산고 농구부를 등장시키는 오프닝. 여기서 이미 게임 끝이다. 가슴이 뻐근하고 눈가가 촉촉해진다. 만화에서도 압도적 연출로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한 산왕 전. 그 질감을 제대로 살려낸 영상미는 뭘 더 바랄 게 없다. 숱한 명대사와 명장면의 재림. 살아 움직이는 강백호와 서태웅의 하이파이브로도 포만감은 차고 넘친다.
포인트 가드 송태섭의 주인공 등극도 탁월한 선택. 슬램덩크 ‘정신’에 딱 들어맞는다. 비주류의 뒤를 돌아보지 않는 도전에 누군들 이만큼 어울릴까. 참고로 영화는 그가 오키나와 출신임을 밝히는데, 현지에선 만화 연재 때부터 짐작됐던 설정이라 한다.
원작에서 태섭의 일본 이름은 ‘미야기 료타.’ 미야기는 오키나와의 대표적인 성씨(姓氏)다. 조선이 나라를 뺏긴 을사늑약 30년 전. 1875년 일제에 함락된 류큐(琉球)왕국이 오키나와다. 지금도 독립을 외치는 이들이 존재하는 비주류 중의 비주류. 보수 성향으로 알려진 원작 만화가이자 영화감독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의도한 게 아닐지라도. 료타가 중심인물인 건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완성도‘란 측면에서 보자면 얘기가 달라진다.
화려한 비주얼과 감격적인 해후에 속으면 안 된다. 이 작품의 리듬과 템포는 퍼석퍼석하다. 재래시장 ‘아이스께끼’를 좋아한다고, 그걸 고급아이스크림이라 우길 순 없다. 이노우에의 감독 데뷔작임을 감안해도 그렇다. “네가 감히…”라는 부라림이 벌써부터 귀청을 때리지만, 내지르고 도망가련다.
일단 영화의 전개가 들쑥날쑥하다. 힘줄 때 힘주지 못하고, 쳐낼 대목을 쳐내지 않았다. 그렇다보니 극적 흐름이 바뀌는 변곡점이 전혀 드라마틱하질 않다. 특히 강백호의 리바운드 각성과 서태웅의 완전체 변신이란 이야기의 핵심포인트가 무게감을 잃어버렸다. ‘송태섭의 시점’이란 시도에 불가피한 희생이겠으나… 그 어정쩡함은 본질이 흐려지는 결과를 낳았다.
태섭의 과거 씬도 아쉽다. 자꾸 어물어물 늘어진다. 원작 팬에게 새로운 에피소드는 감사하다. 한데 현재와 회상의 전환이 군데군데 성기다. 묵직한 가족사(史)를 담기엔 태섭의 캐릭터가 다소 일차원인 점도 한몫했다. 복합적 심정이 그런대로 묻어나는 태섭 엄마가 차라리 입체적이다.
어쩌면 이건 감독보단 제작사를 탓해야 한다. 이노우에는 만화야 대가지만 스크린은 초보다. 만화를 읽는 속도와 영화를 보는 타이밍은 다르다. 그럼 영화를 좀더 아는 타짜들이 적극 ‘영화의 문법’을 어필했어야 한다.
원작 몰라도 재미있단 말 역시 허언에 가깝다. 각자 즐기는 맥락은 다를 수 있다. 그래도 책을 읽은 이의 감흥엔 반의반도 못 따라온다. 왜 서태웅이 정우성에 쳐 발리고도 씩 웃는지, 왜 강백호에게 ‘영광의 시대’가 지금인지 만화책을 안 보면 어찌 알까. 그건 다스 베이더가 누구 아빤지도 모르고 스타워즈의 요즘 에피소드를 보는 ‘앙꼬 빠진 찐빵‘과 진배없다.
물론 이런 지적, 쓰잘머리 없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아바타를 이긴 일본만큼은 아닐지언정 한국도 반향이 클 게 자명하다. 그저 다시 만난 게 고마울 따름이니. 아사코처럼 3번 이상 만나도 후회하지 않을 터.
다만 그건 작품이 훌륭해서가 아니다. 그건 당신, 그 시절 파릇했던 우리의 힘이다. 영화의 헐거운 만듦새를 우리네 소중한 추억이 옴팡지게 메워준 거다. 이 영화의 진짜 숨은 미덕은 작품 자체에 있지 않다. 가슴 속 불씨를 그리도 오래토록 간직해온, 바로 ‘당신들’이 주인공이다.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고요.” 슬램덩크 팬이라면 잊을 수 없는 강백호의 대사. 그 되알진 고백은 실은 우리의 진심이니까.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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