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를 지으면 내일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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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떡국 대신 지난해 말린 시래기로 국을 끓여 먹었다.
시래기는 빨래건조대에 며칠 말리다 식품건조기에 넣어가며 오래오래 말렸는데 먹을 때도 반나절 전에 한 번 삶아 불려야 해서 여간 번거로운 재료가 아니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지난해에 절이고 얼려둔 토마토, 완두콩이 내 마음을 든든하게 한다.
하지만 올해의 텃밭에서 살아갈 씨앗을 매만지며 내일의 농사를 고민하는 시간만큼은 두려움보다는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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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떡국 대신 지난해 말린 시래기로 국을 끓여 먹었다. 시래기는 빨래건조대에 며칠 말리다 식품건조기에 넣어가며 오래오래 말렸는데 먹을 때도 반나절 전에 한 번 삶아 불려야 해서 여간 번거로운 재료가 아니다. 하지만 한입 먹어보니 올가을에 무농사를 지어볼까 싶을 정도로 구수한 맛이 깊다. 경기도 양평에서 농사짓는 친구가 기른 토종 ‘쥐꼬리무’로 깍두기를 담가 먹고 남은 무청을 삶아 말린 거다.
국 한 그릇에도 재료 하나하나마다 사연이 있다. 고춧가루는 오래전 채식모임에 갔다가 최근 강화도로 귀농했다는 언니를 알게 됐는데 몇 년 만에 ‘찐농부’가 된 모습으로 농부시장에서 다시 만나 반가운 마음에 샀고, 마늘과 쌀은 경북 고령의 여성 농민이 길렀는데 벌써 5년째 이 농가의 쌀을 먹고 있다. 이 여성 농민은 문자로 주문을 넣을 때마다 “마침 쌀을 도정하러 갈 참이었는데 어떻게 알았냐”며 함께 도정한 현미나 통밀쌀을 덤으로 넣어준다. 그리고 달큰하고 매운맛으로 요리의 화룡점정을 찍어주는 ‘음성재래초’는 딱 한입 먹고도 반해버린 충남 부여의 여성 농민들이 담근 김치의 비결이었다기에 씨앗을 구해 내가 키운 거다!
2022년은 ‘가뭄’과 ‘폭우’ 두 단어로 대체해도 무방할 정도로 지독하게 가물거나 비가 오는 날이 많았다. 기후위기를 생각하면 한없이 암담해지지만 텃밭에 있던 날은 대부분 좋았다. 텃밭을 가끔 도와야 하는 아내의 취미생활쯤으로 여기던 남편도 농사일을 자기 일로 여기게 됐고, 가끔 손수레에 장비를 챙겨 텃밭에 가서 일하거나 밥을 해먹기도 했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지난해에 절이고 얼려둔 토마토, 완두콩이 내 마음을 든든하게 한다. 혹독한 날씨를 이겨낸 농사의 유산은 냉장고와 유리병에, 그리고 씨앗으로 차곡차곡 쌓여 내일의 나를 먹여 살린다.
올해의 날씨는 땅을 일구는 사람들을 얼마나 당황하게 할지 상상할 수도 없다. 하지만 올해의 텃밭에서 살아갈 씨앗을 매만지며 내일의 농사를 고민하는 시간만큼은 두려움보다는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하다. 올해도 텃밭에 친구와 이웃을 초대해 좋은 시간을 보낼 여유가 있기를. 올해의 나는 척박한 언덕을 끌어안는 풀과 작물을 닮은 사람이 되기를. 조금 더 든든하게 기르고, 먹고, 먹이고 싶은 내일의 밥상에는 텃밭의 무엇과 나의 어떤 관계가 담길까. 농사지으며 내일이 기대되는 이유다.
글·사진 이아롬 프리랜서 기자
*농사꾼들: 농사를 크게 작게 지으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김송은 송송책방 대표, 이아롬 프리랜서 기자, 박기완 경남 밀양의 농부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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