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反푸틴’ 목소리 냈다가… 추락·중독 ‘의문의 죽음’ 줄이어 [세계는 지금]

유태영 2023. 1. 14.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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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올리가르히 수난시대
우크라전쟁 비판 ‘소시지 재벌’ 안토프 등
지난해 기업인 등 24명 국내외서 돌연사
일각 “살인인지 자살인지는 중요치 않아
배후 크레믈… 의문만으로 재갈 물린 효과”
서방선 ‘푸틴 압박’ 노려 올리가르히 제재
호화재산 등 압류… 상위 24명 118조 잃어
지난달 24일(현지시간) 러시아의 ‘소시지 재벌’ 파벨 안토프가 인도의 한 호텔 3층 창문 밖으로 떨어져 숨진 채 발견됐다. 똑같은 호텔에서, 그의 사업상 동료이자 이번 65세 생일 기념 인도 여행에 함께했던 블라디미르 비데노프가 심장마비로 급사한 지 이틀 만이었다.
파벨 안토프. SNS 캡처
블라디미르스키 스탄다르트라는 육가공업체 설립자인 안토프는 재산이 1억4000만달러(약 1740억원)로 추산되는 자산가이자 모스크바 동부 블라디미르 지역의회 의원이다. 정권과 긴밀히 연결된 신흥 재벌, 즉 올리가르히(Oligarchy)로 분류할 수 있다.

안토프는 지난해 6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주거지역을 폭격해 민간인이 사망한 것을 두고 왓츠앱에서 “테러 외엔 뭐라고 부를 말이 없다”고 했다가 황급히 삭제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여러 명의 올리가르히가 안토프와 유사한 방식으로 사망했다. 러시아 국영 에너지기업 가스프롬이 소유한 스키 리조트 임원 안드레이 크루코프스키가 5월 러시아 소치 인근 절벽에서 떨어져 숨을 거뒀고, 러시아 최대 민간 에너지기업 루크오일의 라빌 마가노프 회장은 9월 모스크바의 한 병원 6층 창문에서 추락사했다. 12월에는 건설업체 돈스트로이 창업주 드미트리 젤레노프가 프랑스 휴양지의 식당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숨을 거뒀다.
미국 CNN방송과 공영라디오 NPR는 “2022년 적어도 12명의 러시아 유명 기업인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고로 사망했다”고 전했다. 미국 시사 매체 애틀랜틱은 여기에 항공·철도 관료, 언론인 등의 죽음을 더해 “약 24명의 주목할 만한 러시아인들이 석연찮은 방식으로 숨졌다”고 했다.

◆극단 선택·추락·독살… 꼬리 무는 의문의 죽음

사인은 자살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 가장 많다. 투신 또는 추락사만 안토프 등 7명이다. 이밖에 가스프롬의 운송 부문 책임자 레오니드 슐만 등 2명은 유서를 남기고 죽었다. 의료기기 업체 메드스톰의 바실리 멜니코프 최고경영자(CEO) 등 3명은 가족과 함께 숨진 채 발견됐다.

나머지는 심장마비, 약물중독, 헬기 충돌사고, 원인 미상 등이다. 물론 이들의 죽음이 자연적이거나 우발적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도 많게는 24명이나 되는 숫자나 죽음의 방식 등에서 수상한 점이 너무 많다.
애틀랜틱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충분한 충성심을 보이지 못한 올리가르히들에게 극단적 선택을 강요하는 것은 불가능한 시나리오가 아니다”라고 했다.

러시아 군사정보기관(GRU)에 관한 책을 집필한 야후뉴스 선임기자 마이클 와이스는 “안토프는 인도에서 정말 창밖으로 뛰어내렸을까, 아니면 크레믈궁이 보낸 요원에게 떠밀렸을까. 그것도 아니면 가족에 관한 협박을 받으며 투신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 연락을 받은 것일까”라며 “이 모든 것들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가해자와 사인을 은폐하기 쉬운 독살도 러시아가 흔히 사용하는 방식이다. 지금은 옥에 갇혀 있는 ‘푸틴의 정적’ 알렉세이 나발니는 2020년 맹독성 생화학무기인 노비촉 중독 의심 증세로 생사를 오갔다.
러시아 당국이 관여됐다는 의심을 사도 상관이 없다. 살인으로 단정할 확실한 증거만 남지 않으면 된다. 실제 각국 수사당국은 살인사건이 아닌 사고사로 다뤘다.

언론인이자 러시아 분석가인 율리야 이오페는 NPR에 나와 “잇단 죽음의 배후에 크레믈궁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조차 없다. 살인인지 자살인지도 중요치 않다”며 “그저 의심하게 만들면 된다.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은 크레믈궁을 비판하지 않고 입을 다문다”고 말했다.

◆제재가 옥죄는 올리가르히의 삶

영국 BBC방송은 의문사한 이들 중 다수가 공개적으로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판한 적이 있다고 분석했다. 개전 초기 성명을 통해 전쟁을 ‘비극’이라고 표현하면서 휴전과 대화를 촉구했던 루크오일의 경우 수석 매니저와 회장이 모두 주검이 돼 나타났다.

12∼24명 사망자 전부의 정확한 속내는 알 수 없다. 다만 우크라이나전과 그로 인한 서방의 제재가 러시아 지배 엘리트에게 달갑지 않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뉴욕타임스는 일부 올리가르히가 서방의 강력한 제재를 받은 뒤 의구심과 좌절감을 표출하고 있다고 전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AP연합뉴스
비자 제한, 계좌 동결, 호화 자산 압류 등 각종 제재는 기업활동뿐 아니라 호화롭고 자유로운 삶, 부의 축적에 큰 방해가 된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첼시 구단주였던 러시아의 대표적 올리가르히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제재 경고가 나온 지난해 2월 최소 10곳의 비밀 신탁회사들이 관리해온 자신의 재산 수혜자를 자녀 7명으로 변경했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이 전했다. 제재를 피하려고 이런 꼼수까지 쓸 정도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3월 “우리는 유럽 동맹들과 함께 당신들의 요트, 고급 아파트, 개인 비행기들을 찾아내 압류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미국은 법무부 산하에 특별 태스크포스(TF)까지 꾸렸다. 법무부는 제재가 “러시아 관료들, 정부와 동맹을 맺은 엘리트들, 그들의 불법적인 행동을 돕거나 은폐하는 이들의 범죄를 겨냥함으로써 러시아를 세계 시장으로부터 고립시키고 전쟁에 대한 심각한 비용을 부과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푸틴 대통령의 자금줄이나 러시아 정·관·재계를 장악한 이들을 옥죄면 푸틴을 압박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 제재가 가해진 것이다. 실제 서방 제재로 아브라모비치가 기존 순자산의 57에 해당하는 102억달러(약 12조7000억원)를 잃어 현재 자산 규모가 78억달러(약 9조7000억원) 수준으로 줄어드는 등 가장 부유한 올리가르히 24명의 순자산이 지난해에만 950억달러(약 118조원) 감소했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러시아의 최대 투자사였던 허미티지 캐피탈을 창업한 영국 금융가이자 반푸틴 인사인 빌 브라우더 역시 미 CBS방송에 서방 제재의 목적은 올리가르히들이 푸틴에게 전쟁 중단의 압력을 가하도록 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쟁 반대 목소리를 낸 결과가 석연찮은 죽음으로 이어지는 상황에서 이들의 남은 선택지는 침묵뿐이다.
로만 아브라모비치.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소련 붕괴 후 출현한 정권유착 ‘신흥재벌’… 푸틴시대 ‘2세대’ 등장

올리가르히(Oligarchy)는 소수의 지배, 즉 과두정치(寡頭政治)를 뜻한다. 그리스어 ‘올리고이’(소수)와 ‘아르케인’(통치하다)에서 유래한 말이다.

옥스퍼드사전은 올리가르히의 단수형 올리가르흐(Oligarch)를 ‘극도로 부유하고 강력한 사람, 특히 소련 해체 후 사업 분야에서 부를 쌓은 러시아인’이라고 정의한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1세대 올리가르히는 1991년 소련 붕괴 직후 출현했다.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러시아를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국가 자산 축적을 위해 민영화에 나서자 광산, 공장, 에너지기업 등을 헐값으로 사들여 거대한 부를 축적했다. 1995년 국영 석유회사 시브네프트를 2억5000만달러에 사들인 뒤 2005년 131억달러를 받고 국영 에너지기업 가스프롬에 넘긴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1세대 대표 주자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2000년 집권 후 금융권력을 통제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올리가르히를 만들었다고 WP는 전했다.

티모시 프라이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2세대 올리가르히를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첫째, 푸틴과의 오랜 친분을 바탕으로 거대 국가사업을 수주하며 기업을 키우는 유형이다. 푸틴의 유도 스파링 파트너 출신으로 40억달러(약 5조원) 규모 케르치해협대교(크름대교) 건설 계약을 따낸 아르카디 로텐버그가 대표적이다.

둘째는 푸틴에게서 주요 국영기업 경영자로 임명된 경우다. 푸틴의 가장 신뢰받는 조언자로 알려진 이고르 세친은 부총리를 지낸 후 지금은 국영 석유회사 로스네프트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다.

마지막은 국가안보 매파들이다. 이들 중 일부는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 시절의 푸틴과 인연이 거슬러 올라간다. 프라이 교수는 “전통적 의미의 올리가르히는 아니지만, 연줄을 활용해 보안서비스 분야에서 돈을 챙기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유태영 기자 anarchy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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