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트 폭력, 교사 성추행…이서수 작가의 새대를 잇는 몸의 폭력
“우리는 여자로 태어나지 않는다. 여자가 된다.”
보부아르의 이 유명한 명제는 여자가 생물학적 성이 아닌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자신도 모르게 내재화된 여자되기는 여자 스스로 남자의 눈으로 자신의 몸을 대상화해 바라보게 만든다.
이 제2의 눈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운 걸까?
‘미조의 시대’로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한 이서수 작가의 ‘몸과 여자들’은 여자의 몸이 어떻게 폭력의 대상이 되는지 생생한 고백체로 들려준다.
“저의 몸과 저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실로 부끄러운 고백이어서 저는 단 한 번밖에 말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넓고 텅 빈 무대 중앙, 그리 밝지 않은 조명 아래 한 여성이 의자에 앉아 나직이 읊조리는 것 같은 시작이다.
83년생 여자 아이는 어릴 때부터 앙상할 만큼 말랐다. 학교에 입학한 뒤, 가장 힘없는 아이로 낙인 찍히면서 아이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게 된다.
남자 아이들은 툭하면 밀치고 도망쳤고, 힘없이 쓰러지는 모습을 재미있어 했다. 여자아이들은 자기 숙제를 대신 시키거나 물건을 강제로 빼앗았다. 그래도 저항하지 못할 걸 알기 때문이다. 왕따는 또 한 명 있다. 뚱뚱한 민주다. 아이들은 더럽다고 냄새난다고 성적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모욕적인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 아이들이 민주를 괴롭히면 대신 나는 편안하다. 열 살이었다.
바짝 마른 몸은 중학생이 되자 2차 성징이 나타나지 않아 부끄러운 몸으로 인식된다. 이상한 아이로 취급받던 나는 멘스가 시작되자 책상 위에 생리대를 올려놓고 배 아픈 척을 하며 몸의 정상성을 시위한다.
성인 남녀의 리비도가 넘치는 대학은 신세계가 따로 없다. 그러나 납작한 가슴과 말라 빠진 몸은 남학생의 눈에 매력적인 몸으로 보이지 않을 거란 걸 안다. 그래서 속옷 가게로 달려가 뽕이 잔뜩 들어간 브래지어를 구매한다.
첫 데이트를 하고, 몇 번의 데이트를 거쳐 정식 사귀기 시작한 상대는 섹스를 집요하고 지속적으로 요구한다. 그게 당연한 수순, 권리라는 듯. 나는 그걸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 가늠이 안된다. 친구들 은 거쳐야 할 수순 정도로 생각한다.
상대는 섹스를 거부한다고 거의 매일 화를 냈고 나는 차츰 불편하고 괴로운 마음이 된다. “그를 사랑하고 그와 섹스를 해도 괜찮은 건 맞지만 섹스를 꼭 해야 하나.”
그리고 그 날, 그 사건이 벌어진다.
애인은 한낮에 지하철역으로 불러내더니 다짜고짜 역 근처 모텔로 끌고간다. 손을 뿌리치고 도망치려 했으나 강한 힘에 짐짝처럼 밀려 끌려간 것이다. 나는 모든 걸 포기하고 시체처럼 반듯하게 누워 일을 치른다. “저는 제 몸과 저를 분리시켰고 그가 몸을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몸이 왜 저와의 섹스를 원하는지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것일 수 있다고요. 어쩌면 그는 굳이 제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와 섹스가 너무나 하고 싶었고, 마침 제가 애인이기에 그 욕구를 해소한 것인지도 모른다고요.”
2부에선 59년생 엄마의 고백이 흘러나온다.
어렸을 때 부터 하얀 피부에 늘씬하고 조숙했던 엄마는 부러운 몸의 대상이 된다. 학교에 들어가자 아이들은 물론 선생님들의 칭찬이 자자하다. 나는 아이가 아니라 아름다운 몸을 가진 여자로 착각한다.
어느 날 수업이 끝난 뒤, 담임이 교실에 혼자 남으라고 말한다. 아이들이 모두 떠들썩하게 떠나고 빈 교실, 노총각 담임은 맞은 편에 앉더니 잠깐 일어나보라고 말한다. 이리 와보라고, 그리고 가만히 끌어당겨 안았다. 오랫동안.
나는 그 얘기를 아무한테도 하지 못한다.
중학교에 들어가 여전히 예쁜 아이로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아버지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된다. 여자는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내 몸은 어떻게 사용되는 게 맞는 걸까?
작가는 다양한 상황 속에 몸을 던져 놓고 내 몸의 주인되기로 나아가는 천천한 발걸음, 모색을 보여준다.
이서수는 작가의 말에서 “나는 전해야 할 누군가의 목소리가 있다는 믿음을 품고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한다. 이 소설 역시 그러한 믿음에서 출발했다. 그 목소리는 오래전부터 내 안에 고여 있었고, 자라면서 더욱 증폭되었으며, 언젠가 밖으로 뚫고 나오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고 썼다.
이 책을 낸 출판사 베테랑 편집자는 스무살인 딸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책을 만들었다고 했다.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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