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는 짐짓 놀랐습니다. 유구한 문명을 자랑하는 이집트 신전에 관광차 갔더니, 황당한 요구를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군대 훈련소 신체검사 현장도 아니고, 그렇다고 목욕탕도 아닌데 바지를 벗으라니. 거기에 ‘징표’를 보여달라니. 이유를 물으니 더욱 어처구니 없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이곳은 성스러운 곳이오, 그러니 ‘수술’을 받은 신성한 남자만 들어올 수 있소.”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내가 ‘그 수술’을 받지 않아서입니다. 오히려 그는 수술받은 이들을 혐오했습니다. 남자의 이름은 피타고라스. (우리의 골머리를 앓게 한 그 수학자가 맞습니다) 그가 받지 않은 수술의 정체는 바로 ‘고래잡이’, 포경수술이었습니다. 2500년 전 피타고라스가 이집트를 여행했을 때 겪은 일화입니다.
이집트 신전에서는 왜 ‘할례’, 요즘 말로 ‘포경수술’을 한 남성에게만 입장을 허용했을까요. ‘고래잡이’를 좋아했기 때문일까요. 미적으로 아름답다고 여겼기 때문일까요. 그리고 위대한 수학자 피타고라스는 왜 포경수술 한 사람들을 혐오한 걸까요. 네 번째 사색, 포경(Circumcision)의 역사입니다.
“귀두를 드러낸 자(?)만이 이 신전에 들어갈 수 있소”
최초의 포경은 1만 5000년 전으로 추정됩니다. 첫 등장은 “부족간 전쟁에서 패한 남성들에게 굴욕을 주기 위해서”(할례의 역사 中·피터 찰스 레몬디노)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성기가 남성성의 징표인 만큼, 여기에 상처 줌으로 상대 부족의 위상을 꺾겠다는 목적이었습니다. 아프리카 동쪽인 에티오피아를 시작으로 이집트 문명까지 퍼진 것으로 분석합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포경수술이 광범위하게 시행됩니다. 수도였던 사카라에 있는 왕족의 무덤에는 할례의 이미지가 남아있습니다. 때는 기원전 2400년 전 그림으로, 할례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집트의 더운 날씨로 소변이 음경 포피에 남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수술을 했다고 추정합니다.
할례는 그러나 ‘청결’보다는 ‘신성’(神性)의 관점에서 이뤄졌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장례 문서 중 하나인 ‘사자의 서’에 묘사된 태양신 ‘레’(RE)는 포경수술을 한 신으로 묘사됩니다. 태양의 신이 할례를 받았다면, 그를 숭배하는 성직자들은 신에 대한 복속의 증거로 포경수술을 행해야 했습니다. 이 신전에 들어오려는 사람도 마찬가지의 ‘자격 요건’(?)을 요구받았죠. 기원전 550년 신성한 책을 보기 위해 이집트 신전을 찾은 천하의 피타고라스가 문전박대를 당한 배경입니다.
할례(割禮), 성스러운 이름으로
종교적 목적으로서 ‘할례’ 문화는 고대 근동 세계로 퍼져나갑니다. 이를 문화적으로 계승한 나라가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이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켰다는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당시 이스라엘의 신화·성경에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흔적이 짙게 배 있습니다) 이들은 이집트인들처럼 하느님에 대한 복종의 표시로 할례를 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 구절을 보시죠.
“모든 남자는 할례를 해야 한다. 너는 포피를 잘라내야 할 것이니, 그것이 너와 나 사이 약속의 증표가 될 것이다. 너희 중에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아라. 남자는 포피를 베어 내지 아니하면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섬?한 신의 경고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민족적 시련을 겪을 때마다, 율법으로 돌아가려 했죠. 하느님의 말씀만이 민족을 번성하게 할 유일한 수단으로 여겼습니다. 유대교에서 지켜야 할 중요한 계명인 ‘미츠바’에 할례가 들어가게 된 이유입니다.
창세기의 기록에 맞춰 유대인 아이들은 태어난 지 8일째 되는 날 할례를 받았습니다. 유대인이었던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기독교가 유럽의 경제·문화·사회를 지배하던 중세 유럽에서 예수 포피는 가장 귀중한 유물 중 하나가 됐습니다. 로마의 성 라테란 교회를 비롯한 10개의 교회가 “아기 예수의 포피를 보관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죠.(성기가 지네 다리도 아니고. 가톨릭의 무분별한 ‘성물’ 주장은 종교개혁을 불러오는 계기가 됩니다) 동방정교회에서는 예수의 할례를 기념해 1월 1일을 축일로 삼았습니다.
임신에 어려움을 겪은 귀족 여성들은 불임을 치료하고 출산의 고통을 줄인다는 이유로 신성한 포피가 보관된 교회를 찾았습니다. 잉글랜드의 성군으로 통하는 헨리5세의 부인 캐서린도 이를 통해 수혜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감춰야 산다”...다시 ‘귀두 덮기’ 나선 유대인
문명은 언제나 충돌합니다. ‘할례’ 문화를 혐오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고대 지중해 세계의 절대 강자 중 하나인 그리스였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성에 개방적인 민족이었습니다. 운동을 할 때도 나체 상태로 땀 흘리기를 즐겼습니다. 근육질 남성의 몸을 찬미하고, 신에게 이를 바치는 행위로 여겼지요. 체육관을 뜻하는 영어단어 ’GYM’의 어원이 된 고대 그리스어 ‘gymnos’(짐노스)는 ’누드‘를 의미합니다.
그리스인의 ’나체‘에는 그러나 원칙이 있었습니다. 전부 벗되, 귀두는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귀두를 보여주는 걸 흉하다고 여겼습니다. 운동을 할 때 혹여 귀두가 드러날 것을 우려해(운동하다가 무슨 생각을 한 걸까요), 포피 끝을 키노데스메라는 끈으로 묶었을 정도입니다.
이런 그리스인들에게 포피를 일부러 제거해 귀두를 드러낸 이집트인들이나, 유대인들은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가 절대 강자로 부상하면서 유대인들도 그들의 땅에 더부살이를 시작하자 사태는 악화했습니다. 그리스인의 미적 기준을 준수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고위직 장군이었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할례 담당 랍비인 ’모헬‘을 돌로 때려 죽였다는 기록도 전해집니다. 위대한 피타고라스도 만약 2022년의 대한민국을 찾았다면, 한국 남성들을 끔찍이 혐오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생존해야 했습니다. 방법을 고안합니다. ’주데움 폰둠‘. 황동으로 만든 깔때기 모양의 추였습니다. 남아있는 포피 쪽에 매달면, 그 무게 때문에 살이 당겨져 귀두가 다시 덮일 수 있다는 계산이었습니다. 임시방편이 불안한 유대인들은 ’에피파스모스‘라는 수술을 단행합니다. “당겨서 덮는다”는 뜻의 그리스로 일종의 포피재건술이었지요. 강대국으로부터 오는 혐오를 피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죠.
나치가 유대인을 가려낸 방법...“할례한 남성 찾아라”
역사가 반복되듯, 혐오도 반복됩니다. 약 2000년 후, 민족혐오는 보다 끔찍한 방법으로 재현됩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었습니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잡습니다. 그는 공공연히 이야기 합니다. “위대한 아리아인인 우리 독일인이 빈곤한 건 유대인 때문이다.” 이제 독일 전 사회가 유대인을 색출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엔 배제하기 위해서, 나중엔 학살이 목적이었습니다.
유대인을 구별할 수 있는 가장 편한 방법의 하나. 바로 할례였습니다. 유럽의 기독교인은 할례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독일 자경단들은 유대인으로 의심되는 집을 급습했습니다. 그들이 유대인임을 문서로 증명하지 못하면, 그 집 가장의 바지를 벗겼습니다. 포경수술 받은 성기가 증거라고 여겨서였습니다.
가장 많은 학살이 일어난 폴란드에서 수천 명의 유대인들은 이를 피하고자 포피재건술을 받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2000년 전 수술은 차별을 피하기 위해서였고, 2000년이 지난 후에는 생존을 위한 절박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역사는 진보한다”는 명제는 위선으로 가득한 문장입니다. 우리는 우스갯소리로 ’포경수술‘을 이야기하지만, 누군가에겐 애환의 상징임을 사색합니다.
역사(史)에 색(色)을 더하는 콘텐츠 사색(史色)입니다. 역사 속 외설과 지식의 경계를 명랑히 넘나듭니다. 가끔은 ‘낚시성 제목’으로 알찬 지식을 전달합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해주세요. 매주 토요일 알롱달롱한 역사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