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유지 편향’ 심리, 그리고 연금개혁 성공시킨 넛지 이론
이재성의 노벨경제학상 다시 읽기
‘넛지 이론’ 창시자 리처드 세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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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전주의 경제학은 복잡한 경제현상을 쉽게 설명하는 방편으로 단순화를 지향한다. 단순화란 조건을 정하고 차이를 소거하는 과정인데, 그중에서도 핵심적인 설정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개인을 모델로 세우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인간은 불완전하고 모순적이다. 즉흥적인 동시에 계획적이고, 합리적인 동시에 불합리하다. 결국 신고전주의 경제학이 현실과 맞지 않거나 실제 현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비판이 싹튼다. 이 난관을 타개하려는 흐름의 하나가 심리학을 경제학에 접목한 행동경제학이다. 행동경제학은 추상적인 이론이나 공식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경제 행위를 하는지에 주목하는 학문이다.
심리적 회계 이론
2017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리처드 세일러(Richard Thaler, 1945~)는 2013년 수상자인 로버트 실러(Robert Shiller, 1946~)와 함께 행동경제학의 대가로 평가받는다. 수상 이유도 “행동경제학에 대한 기여”다. 노벨상위원회가 “신고전파 모델과의 급진적인 단절”이라고 평가한 세일러의 대표 연구가 ‘심리적 회계’(Mental Accounting) 이론이다. ‘정신적 계좌’로 번역해도 무방한 이 이론은 사람들이 지출을 한 덩어리로 생각하지 않고 주택이나 음식, 옷 등으로 범주화해서 별도의 심적 계정으로 나누어 생각한다는 경험적 관찰이다. 이에 따라 당장 필요하지 않거나 중독성 있는 상품에 과잉지출을 하게 된다고 세일러는 분석한다.
후속 연구(Shapiro, 2013)에 따르면, 2008년 휘발유 가격이 50% 하락했을 때 일반 휘발유보다 프리미엄 휘발유를 선택하는 경우가 표준수요모델에서 예측한 것보다 14배나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가격이 변하지 않은 다른 제품에서는 높은 품질로 이동하는 경우가 발견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마음속에 ‘휘발유 계정’을 따로 갖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평소 자동차 급유에 썼던 돈을 기준으로 이 정도는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심리적 회계 이론은 재화를 소비하는 즐거움과 그것을 지불하는 고통 사이의 상호작용을 분석한다. 예를 들어 와인셀러를 사전구매하는 행위는 구매가 아닌 투자로 간주하고, 이전에 사둔 와인을 저녁식사에서 개봉하는 건 무료로 코드화한다는 것이다. 소비가 지불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정도를 ‘커플링’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지출과 소비를 분리(디커플링)하면 지불의 고통이 줄어들게 된다. 이를 ‘쾌락 편집’(Hedonic editing)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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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넛지’로 연금 개혁
세일러가 보기에 인간의 합리성은 제한적이고(Limited rationality), 자제력은 부족하다(Limited self-control). 하지만 늘 비합리적이고 늘 방만한 것도 아니다. 이런 인간의 모순적 본성을 개념화한 이론이 ‘계획자-실행자(Planner-Doer) 모델’이다. 멀리 보면서 계획을 세우려는 자아(계획자)와 당장의 쾌락을 추구하려는 자아(실행자)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세일러를 대중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넛지(Nudge) 이론이 여기서 나온다. 누군가 합리적 자아를 조금만 도와주면 자제력이 부족한 자아를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일러의 제안으로 넛지 이론을 적용해 성공한 분야가 연금저축이다. 기존의 연금저축은 저축률이나 투자방법 등을 직원 스스로 결정하도록 했는데, 이걸 자동등록으로 바꿔서 기본 저축률과 투자전략을 미리 정해놓는 것이다.
사람들은 지금 당장 집에 가져가는 돈이 적어지는 걸 싫어하기 때문에 저축률을 낮춰잡는 경향이 있는데, 미래의 급여 증가와 연동하여 저축을 늘려나가도록 설계해 당장 손해 본다는 느낌 없이 저축률을 높일 수 있었다. 일단 등록만 하면 ‘현상유지 편향’이 작동하여 탈퇴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반대 진영에서 ‘자유주의적 가부장주의’라고 비판하는 넛지 이론은 국가와 개인이 상생할 수 있는 실용적 아이디어로 전세계 정부가 폭넓게 받아들여 다양한 분야에 활용하고 있다.
독재자 게임과 공정성
세일러의 기념비적 연구가 너무 많아 여기서 다 소개하기는 어렵지만, 마지막으로 하나를 더 꼽으라면, 공정성을 경제학의 주요 연구 주제로 정립한 업적을 빼놓을 수 없다. 세일러는 동료 연구자들과 함께 ‘독재자 게임’이라고 알려진 실험을 했다. 학생들에게 20달러씩 나눠주고 무작위로 추첨한 익명의 동급생 한명과 나누는 방법을 두 가지로 제한했는데, 10달러씩 균등하게 나눠 가진 학생이 76%였다. 자기가 18달러를 갖고 2달러를 다른 학생에게 주는 이기적인 결정을 한 사람은 소수였다. 익명의 거래여서 평판에 대한 우려가 없는데도 대다수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지 않은 것은 사회적으로 공평함이 선호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독재자 실험에는 두 번째 부분이 있었는데, 각 학생은 실험에 참여한 다른 두 학생과 무작위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첫 번째 실험에서 자신과 다른 두 학생이 서로 다른 결정을 내렸다면, 다음 두 가지 할당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①첫 번째 단계에서 균등하게 나눠준 학생과 자기 자신에게 5달러씩을 주고, 스스로 18달러를 가진 학생에게는 1달러도 주지 않음 ②첫 번째 단계에서 18달러를 가진 학생과 자기 자신에게 6달러를 주고, 균등하게 분할한 학생에게 1달러도 주지 않음. 실험 결과, 74%의 학생이 ①을 선택했다. 자신이 1달러를 덜 받더라도 공정한 할당자에게 보상을 주고 이기적인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불공정한 행동으로 자신이 피해를 당하지 않았더라도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면서 불공정한 행동을 처벌하려고 한다는 결론이다. 이를 ‘간접 호혜성’(Indirect reciprocity, Nowak 2006)이라고 부른다. 이후 이어진 후학들의 연구 결과, 인간의 공정성 선호 현상은 일관되게 관찰됐고, 이를 통틀어 ‘불평등 혐오’(Inequality aversion)라는 개념이 정립됐다.
인간은 이기적 동물이지만, 이기적이기만 한 동물은 아니다. 불평등과 불공정이 세상에 가득 찼을 때 민심이 크게 뒤집혀 혁명이 일어나는 것은 인간 본성의 자연스러운 발현이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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