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너무 썩었어, 그래서 더 끌려”...사랑할 수밖에 없는 ‘부패’ [전형민의 와인프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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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음식들의 공통점을 아시나요? 푹 삭혔거나 부패에 가깝게 숙성해 웬만한 비위를 가지고는 도전조차 하기 힘든 음식들인데요. 아, 굳이 찾아볼 필요는 없습니다. 독자들의 정신건강을 위해 자세한 설명은 생략할게요. 혹시 이 음식들을 모두 맛보신 분이 계시다면 진심으로 그 모험심과 용기에 경의를 보냅니다.
재밌는 점은 이 음식들이 모두 현지에서는 진미로 꼽힌다는 점입니다. 나름대로 각 지방의 특성과 시대상황 등이 반영된 고유한 음식들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가깝게는 우리나라의 홍어회만 보더라도 꽤나 비싼 가격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잊을만 하면 일부러라도 찾아서 즐기는 별미로 유명하죠.
와인 중에도 이름에 아예 대놓고 ‘부패’가 들어가는 녀석이 있습니다. 달콤하고 녹진하면서도 풍성한 과실미를 지녀서 ‘마시는 황금’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오늘은 기네스북에 오른 경매가가 가장 비싼 와인, ‘귀부와인’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썩었다기보다는 마치 썩은 것처럼 곰팡이가 피고 심하게 쪼그라든 겁니다. 포도에 피는 보트리티스 시네레아(Botrytis cinerea)라는 회색 곰팡이가 핵심인데요. 보트리티스는 포도 알맹이 껍질에 피어나 왁스층을 약화시키고 그 사이로 수분이 증발하게 만듭니다. 결국 포도송이는 나무에 매달린채로 서서히 말라가면서 수분을 날리고 일반 포도보다 몇배 더 농축된 과즙만 남는 셈입니다.
얼핏 지난 와인프릭에서 설명했던 아파시멘토 기법과 비슷해 보이죠? 이미 수확한 포도를 말려서 양조한 아마로네가 일반 와인보다 진한 농축미를 지녔다는 점에서요. 하지만 귀부와인은 보트리티스 곰팡이 특유의 풍미가 추가로 생성되기 때문에 그냥 달기만 한 게 아닌 완전히 새로운 와인입니다.
굳이 ‘귀하다’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는 이 보트리티스가 꽤 까다로운 녀석이기 때문입니다. 보트리티스가 번식하기 위해서는 습한 환경이 필수적인데요. 포도가 채 다 익지 않은 상태에서 보트리티스의 공격을 받거나, 습한 날씨가 필요 이상 지속되면 포도는 그저 썩어버립니다. 이러면 양조를 할 수가 없죠.
포도가 알맞게 익은 상태일 때 습한 날씨가 조성돼야하고, 이후 건조한 날씨와 충분한 햇볕으로 포도가 부패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수분을 증발시켜 쪼그라들어야 귀부와인 양조에 적절한 포도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까다로운 조건을 보르도의 한 마을이 충족시킵다. 바로 ‘소테른(Sauterne)’입니다.
소테른은 그런 보르도에서도 남쪽, 가론(Garonne)강에 지류인 시론(Ciron)강이 합류하는 그 사이 삼각지에 위치합니다. 아침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끼고, 오후엔 햇볕이 내리쬐어 하루에도 몇번씩 냉탕과 온탕 사이를 오가죠. 변덕스러운 날씨에 자갈로 된 퇴적지라는 점에서 별 메리트가 없던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따뜻하고 느리게 흐르는 강의 본류에 빠르고 차가운 지류가 합류하면서 밤사이 자욱하게 낀 안개가 습윤한 환경을 조성해 곰팡이를 대규모로 번식시키기 좋은 환경을 만듭니다. 일출 이후 내리쬐는 햇볕은 곰팡이가 약화시킨 포도알 껍질 사이로 수분을 증발시켜주고 과도한 곰팡이 번식도 막아줬죠.
천혜의 기후에 더해 마침 이 동네에서 주로 키우는 품종도 귀부와인 양조에 최적화된 녀석들이었습니다.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이나 세미용(Semillon) 같은 품종들은 포도송이들이 가깝게 밀집돼있고 껍질도 얇아 귀부병의 효과를 극대화하기에 알맞았거든요. 산도가 높고 향이 강한 것도 과실미가 과도하게 농축돼 자칫 달기만한 귀부와인의 단맛을 적절히 중화시켜줬고요.
이렇게 소테른은 귀부와인의 핵심 산지가 됩니다. 물론 귀부와인을 소테른에서만 만들지는 않습니다. 세계 3대 귀부와인으로 헝가리의 토카이(Tokaji), 독일의 트로켄베어렌아우스레제(Trockenbeerenauslese·TBA)도 함께 꼽힙니다. 하지만 소테른이 가장 대표적인 산지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달콤함이 깊이가 있습니다. 꿀이나 밀랍 같은 진득하고 끈적하죠. 바닐라, 카라멜, 헤이즐넛, 버터스카치 등 누구라도 사랑에 빠질듯한 고급스러운 달달함인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끝맛은 달큰함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거든요. 공존하기 어려울 것 같은 단 맛과 산미의 조화에 어느 새 홀린 듯 두번째, 세번째 잔을 들게 만듭니다.
곁들이기 좋은 안주는 치즈 입니다. 블루치즈 계열인 로크포르(Roquefort) 치즈와 프랑스의 거위 간 요리인 푸아그라는 가장 클래식한 소테른 와인의 페어링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힌트는 ‘단짠’입니다. 저는 치즈케이크와 디저트로 함께 즐기기도 하고, 특유의 달큰함을 활용하기 위해 매운 음식과도 종종 페어링하는 편입니다.
샤토 디켐은 북한의 김정일·김정은 부자도 스위스의 수행원을 시켜 북한으로 수백병을 밀수입을 한 와인으로도 유명합니다. 특히 김정일은 샤토 디켐을 세계 각지에서 긁어모아 몇백병씩이나 쌓아놓았을 정도라고 합니다.
기네스북에 오른 1병당 가격이 가장 비싼 와인이기도 합니다. 지난 2011년 영국 런던 리츠칼튼 호텔에서 1811년산 1병이 무려 7만5000유로(당시 환율로 약 1억3000만원)에 팔려 기네스북 최고 기록을 갱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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