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지, 맛있지, 배도 안 나오지…‘김안주’ 이건 반칙 [ESC]
소박한 맥줏집서 나오던 김 구이
값싸고 응용력 좋은 비장의 안주
술맛 돋우는 간간한 감칠맛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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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소박한 초밥집에 가서 늙은 요리사가 막 만들어주는 초밥 한 점에 술 마시는 건 행복하다. 초밥이란 밥과 얹힌 고명의 조화로 만들어지는 법이라 아주 간결하다. 보통 생선살, 고추냉이, 간장이 전부다. 물론 밥에 초를 하고 온갖 기교가 난무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렇다는 뜻이다. 보통 우리가 먹는 초밥은 손으로 빠르게 쥐는 ‘니기리’에서 시작됐다. 빨리 쥐는 초밥 선수는 한 점에 2~3초밖에 걸리지 않는다. 빨리 쥔다고 좋은 것도 아니지만 그만큼 속도가 나기 좋은 음식이다. 초밥이 원래 길가 노점에서 행인을 상대로 해서 생겼다는 역사가 있기도 하다.
고급 재료에서 흔한 반찬 됐지만
초밥집에서는 보통 쥐는 니기리 말고도 군함말이라는 것도 있다. 훨씬 나중에 생긴 방식이다. 밥 위에 얌전히 올라앉기 어려운 재료를 김에 말아서 고정해 팔기 시작하면서 발명됐다. 군함말이는 무엇이든 올리기 좋다. 저렴한 통조림 참치에 마요네즈를 버무려 얹기도 하고, 옥수수 마요네즈 버무림 같은 ‘초염가’의 재료를 쓸 수 있다. 재료비가 크게 낮아져서 초밥집도 그럭저럭 굴러갈 수 있고, 먹는 손님도 그다지 맛이 나쁘지 않아서 좋다. 별것이 다 올라가는데, 소고기가 올라간 것도 충격이었고 쿠키 부순 것,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올린 것도 봤다. 단 것을 올려 먹어도 입맛에 구애받지 않는 젊은 세대는 이런 초밥을 경원하지 않는다.
군함말이는 오이나 당근을 얇게 켜서 두를 수도 있지만 대부분 김을 쓴다. 김이 밥과 고명의 맛을 완성한다. 김은 살짝 염도가 있고 향이 있어서 초밥의 균형을 잡고 여운을 준다. 좋은 김을 쓸수록 물론 더 맛이 좋다. 초밥집에서 군함말이를 할 때 보면, 요리사가 금속으로 된 김 통을 아주 조심스레 연다. 군함말이에는 약간 두툼하고 쓴맛과 고소한 맛이 나는 김을 쓰는 게 보통인데 이 김값이 꽤 비싸다. 김이 아주 값싼 재료가 된 지 오래라 김을 애지중지하는 초밥 요리사를 보면 뭔가 묘한 기분이 든다. 값싼 급식에도 한 봉지씩 오르는, 가장 싼 식재료의 대명사가 된, 김밥천국의 천원 김밥이 나올 수 있었던 원동력인 김을 그리 귀하게 여기다니 어색하기만 하다. 김이 그저 그런 식재료 취급을 받게 되면서 고급 초밥집에서는 좀 멋을 내느라 양식이 안 되어 값이 센 감태를 쓰는 것도 봤다. 김은 원래 자기 가치보다 한참 대우를 못 받는 재료인 건 틀림없다. 양식이 되기 전에는 부잣집 밥상에만 올라갔으니까.
서울 종로구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옥인동 올라가는 길에 아주 허름한 호프집이 하나 있었다. 나이 지긋한 부부가 운영하는데, 이 집 호프가 아주 기막혔다. 요새는 호프집에서 쓰는 맥주 기계는 강제냉각식이라고 하여 디스펜서를 당기면 맥주와 가스가 올라오면서 냉각장치를 통과하는 동안 차갑게 된다. 맥주를 냉장고에 굳이 넣어두지 않아도 얼마든지 차가운 맥주를 즐길 수 있다. 맥주통(케그)을 보관하는 냉장고를 별도로 둘 필요가 없고, 공간 활용이 좋다. 요새 거의 100% 강제냉각식을 쓰는 이유다. 그런데 그 집은 고집스레 옛날식으로 케그 전용 냉장고에 넣어서 보관한다. 실제로 케그는 냉장 보관을 하면 맛이 더 오래 유지된다. 이 집에서 내가 ‘아로마’(aroma)라고 멋대로 부르는 싱싱한 생맥주 특유의 향을 느끼면서 한 잔 마시면 천국이 따로 없다. 나는 이 집에 갈 때 경복궁역 2번 출구에서 내려 일부러 뛰어갔다. 그래야 몸이 더워져서 맥주가 더 맛있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생맥주만 맛있다고 생각한다면 이 집의 절반밖에 모르는 거다. 바로 비장의 김 구이다. 별나게 좋은 김도 아니다. 그냥 어디서나 살 수 있는 그런 김 같다. 그러나 ‘쩐내’라고 부르는, 김이 높은 온도에서 오래 보관되거나 만든 지 오래되어 나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런 김을 아무것도 바르지 않고 가스 불에 굽는다. 연탄에 구우면 더 맛있으려나 모르겠지만, 김 안 구워본 사람이 많을 거다. 식탁용 김이라고 분류하는 양반김, 지도표 성경김은 다 구워서 나오니까. 스테이크라고 생각해보자. 구워서 며칠 있다 먹는 게 맛있을까 바로 먹는 게 맛있을까. 극단적인 비교인데 그 정도까지는 차이가 안 나도 확실히 바로 구운 김, 그것도 사람 손으로 구운 김이 훨씬 맛있을 수밖에 없다. 향은 맛에 아주 큰 영향을 준다. 맛있다, 하는 건 코가 느끼는 향에서 우선 감지된다. 김을 갓 구워주니 맛이 얼마나 좋은가. 참기름 뿌린 간장을 곁들인다. 먹을 만큼 김을 뜯어서 간장에 푹 적신다. 생맥주 한 잔을 절반쯤 꿀꺽꿀꺽 들이켜고 김을 먹는다. 김 향과 참기름 향, 간장의 감칠맛이 마구 퍼진다. 이건 정말 반칙이다.
김에 된장 찍어 먹어 봤나
그럼 왜 다른 생맥줏집에서는 이런 메뉴를 찾아볼 수 없는가. 김 ‘따위’를 돈 받기가 애매해서 그런 것 같다. 생맥줏집은 보통 배가 부른 상태에서 2차로 간다. 안주는 기본적으로 가게의 매출을 걱정해서 하나 시켜두는 기본이다. 그래서 ‘기본’ 안주가 있을 정도다. 안주 먹으러 오는 게 아니라 생맥주를 마시는 가게다. 김은 한국에서 싸구려 재료다.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아까 말한 그 집도 처음에 겨우 천원인가 받았다. 모르긴 몰라도 주인은 메뉴에서 없애버릴까 몇 번 고민했을 것이다. 김 안주 천원에 추가 주문이 끝이면 가게는 먹고 살기 힘들다. 내 기억에는 그래서 김 안주는 일종의 ‘사이드’가 되고, 일반 안주를 하나 시켜야 따로 추가시킬 수 있는 메뉴가 되었던 것 같다. 왜 아니겠는가. 여담인데, 김을 죽죽 찢어서 안주로 다 먹고 나면 손에 검댕이 묻는다. 안주 그릇 바닥에 김가루가 소복이 쌓인다. 그 손으로 김가루를 콕콕 찍어서 또 안주를 하는데 그것참 별미였다.
김은 어떻게 먹든 좋은 안주다. 값싸지, 맛있지, 간편하지, 배도 안 부르지(열량이 낮잖아), 간간하지(술맛을 돋운다), 지나치게 맛이 강하지 않아서 술맛을 깎아 먹지 않지, 게다가 응용도 쉽다.
① 맛소금 뿌린 밥에 싸서 먹는다. 양념 김으로 이렇게 해주는 닭발집이 예전에 서울 답십리에 있었는데, 요새는 하나의 유행이 되었다. 미원을 밥에 많이 뿌려 양념 김으로 싸고, 참기름에 찍어 먹으면 이른바 ‘마약 김밥’과 맛이 비슷해진다. 소주나 맥주 안주다.
② 돌김이라고 부르는 걸(실제로는 대부분 돌에서 긁은 자연산은 아니다) 가스 불에 살짝 구워서 된장을 찍어서 먹어도 기막히다. 입천장이 좀 까져야 훨씬 맛(?)이 있다.
③ 통북어를 안주로 내는 집에서 마요네즈, 간장, 참기름, 청양고추 조합으로 장을 주는데 구운 김에도 어울린다.
④ 그냥 김이나 식탁용 조미 김에 편의점에서 파는 고추 참치캔이나 볶은 김치를 싸서 안주로 한다. 100% 보증한다. 물론 소시지나 핫바에 싸서 먹는 것도 추천한다.
요리사 겸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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