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를 굴리려면 있는 힘껏 함께
〈시사IN〉에서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를 처음 시작한 게 2015년 1월이었으니 거의 8년을 채운 셈이고, 이 글은 이 난을 통해서는 마지막으로 전하는 387번째 역사 이야기가 된다. 기나긴 역사 속에서 찰나 같을 ‘겨우’ 8년이지만 8년 사이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우리 눈앞에서 역사가 되어갔는지는 너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을 거야.
오늘은 마지막으로 네게 무슨 얘기를 해줄까 곰곰이 생각했다. 8년간의 역사 이야기를 어떻게 맺어야 할까 머리를 긁적이며 궁싯거리다가 문득 이 글을 쓰는 일요일 아침이 크리스마스라는 데 생각이 미쳤고 성경 말씀 한 구절이 떠올랐구나.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아빠는 〈시사IN〉을 통해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의 마지막 소재로 이 말씀을 택해보기로 했다.
역사에 대한 ‘믿음’부터 이야기해보자. 우선 너 개인이 어떤 삶을 살지는 네 의지가 결정한다. 태어나 보니 ‘재벌집 막내아들’인 사람들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느냐고 따질 수도 있겠지만 결국 어느 정도를 성취하고 그 안에서 보람 혹은 후회를 거두느냐는 네 몫일 거야. 아빠는 역사도 그렇다고 생각해. 한 세대를 구성하고 같은 시간대를 호흡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무엇에 목표와 가치를 두고 매진하느냐에 따라서 역사의 향방이 결정된다고 말이다.
‘케 세라 세라’(Qué será, será)라는 말이 있다. 요즘은 거의 쓰지 않지만 아빠가 대학 시절에는 이 말이 자주 쓰였다. 특히 준비 하나도 안 한 시험을 보러 들어갈 때 아빠 친구들은 “케 세라 세라”를 부르짖곤 했지. “될 대로 되라지”의 의미였을 거야. 하지만 케 세라 세라의 진짜 뜻은 ‘될 대로 돼라’보다는 ‘어떻게든 되겠지’에 가깝다. 영어로 하면 “What will be will be”, 즉 이루어질 일은 이루어진다는 뜻이야.
따뜻하기보다는 차갑고, 믿는 도끼가 발등 무시로 찍기 일쑤인 현실 앞에서 우리는 가끔 절망하고 자주 주저앉다가 될 대로 되라며 드러누워 버리기 쉽다. 악으로 깡으로 뭔가 해보려 해도 꿈쩍도 않는 바윗덩어리들이 어디 한두 개일까.
하지만 한 개인의 삶에서, 그리고 역사 속에서 그 바윗덩어리들은 결코 대지의 일부가 아니며 언젠가는 굴러갈 수 있고, 굴릴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 앞에서 ‘될 대로 돼라’보다는 ‘어떻게든 되겠지’를 곱씹으며 바위에 달라붙으면 너에 의해, 네 친구들에 의해, 안 되면 네 후배들 그리고 네 아이들에 의해 그 바위도 굴러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주면 좋겠다.
아빠가 대학 때 읽었던 〈페다고지〉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었어. “역사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가득하며, 미래는 숙명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여지가 충분하다.” 아빠는 네가 이 ‘가능성’을 믿기 바란다. 너 개인은 물론 네가 속한 집단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니기 바란다.
그 믿음 다음으로 네게 바라는 것은 역사에 대한 ‘소망’이다. “어떻게 되겠지. 잘될 거야”라고 믿는 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잘된다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잘된 것인지 구체적인 상이 없다면, 무엇이 되고 싶고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은지에 대한 소망, 즉 꿈이 없고 전망이 부재하다면 그 ‘믿음’이란 얼마나 공허해지겠니.
꿈은 관심으로부터 나온다. 우리가 역사 이야기를 나누던 8년의 시간 중에 세상을 떠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어렸을 때부터 ‘대통령’ 세 글자를 책상 앞에 두고 공부했다고 하지. 그가 훌륭한 대통령이었는지에 대한 평가는 뒤로 하고, 아빠는 그 치기 어린 전망이 그의 인생을 규정했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이 될 거라는 믿음을 넘어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 무엇을 해야 한다는 목표가 그 앞에 차례차례 놓였을 것이고, 그것들을 넘어서는 꿈을 꾸었을 테니까.
개인의 삶에서도 그렇지만 역사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이 사람을 찍을지 저 사람을 찍을지, 이 당을 선택할지 저 당을 선택할지, 어느 정책을 지지해야 하는지, 어느 논의에 목숨 걸고 반대해야 하는지, 이걸 골라야 하는지 저걸 골라야 하는지. 수많은 사람들을 햄릿으로 만들어버리는 난제(難題)의 연속이지. 그것들에 대한 관심을 고수하고 실마리를 찾는 노력, 그래서 뭔가 발전된 결과와 진일보한 세상을 지향하는 마음과 자세를 잃지 말기 바란다.
네가 여덟 살 때 세상을 떠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런 말을 남겼다.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아빠는 그 말을 이렇게 해석해본다. 역사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한 인간의 삶은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말은 단순한 인생 예찬도, 역사에 대한 신앙고백도 아니었어. 모진 시련에 겁먹을지언정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향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던, 한때 꺾일망정 역사 앞에서 더 큰 용기를 냈던 한 인간의 희망 고백이었지.
마지막으로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경남신문〉 2010년 7월16일자 기사를 보자. 그해 7월5일 경남 거제시 일운면 면사무소에 난데없는 수건 한 박스가 배달되었어. 보낸 사람은 나이 고희를 헤아리는 형제였어. 6·25 때 열세 살, 열 살이던 형제는 부모와 떨어져 피난선에 올라타 거제도에 떨어진 후 고달픈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 어느 날 일운면사무소 앞에서 배를 움켜쥐고 웅크리고 있는데 그들을 지켜보던 면사무소 직원이 다가섰다고 해. 사정을 들은 공무원은 주머니를 털어 형제에게 500환을 건넸다지. “죽이라도 사먹고 기운 차려라.”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그 500환의 은혜를 형제는 평생 잊지 못했고 “죽기 전에 은혜라도 갚기 위해” 수건 서른 장을 면사무소에 보냈던 거야. 비록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몰라 그 공무원에게 보내지는 못했지만 그분의 500환이 자신들을 살렸다는 의미로, 형제들의 이름까지 또박또박 박아서 말이다. 거제도에 피난선이 상륙한 건 1950년 크리스마스께였다. 갑자기 태풍처럼 밀어닥친 피난민의 홍수를 거제 사람들은 있는 힘껏 함께 버텼다. 책상은 없을망정 학교로 불러들여 가르쳤고 갈치 하나라도 나누려고 애썼고 자기네 땅에 막무가내로 천막을 짓고 살아도 이부자리를 내줬다. 그래서 “거제 사람들의 은혜를 잊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간 피난민들도 많다고 해. 이름 모를 공무원도 그중 하나겠지.
위기에 처한 사람, 고통받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돕고 위로하며 사랑으로 보듬은 것이야말로 인류가 지구의 주인이 된 이유일 거야. 아득한 원시시대에 거동이 불가능할 만큼 큰 부상을 입고도 ‘늙어 죽을 수 있었던’ 인류의 유골은 그 시절에도 약자를 보호하고 가진 것을 나눌 줄 아는 마음이 발휘되고 있었음을 증명해주지.
사람이 사람을 사람같이 보지 않고, 우리와 다르다고 혐오하고 우리보다 못하다고 경멸하며, 누군가 고생하든 말든 내 배만 부르고 내 등만 따뜻하면 ‘알빠노’(내 알 바 아니다) 정신이 횡행하는 세상은 반드시 어두워지고 차가워지며 험난해진다. 이태원 참사로 가족을 잃고 울부짖는 사람들 앞에서 “놀러 가서 죽은 이들” 운운하는 세상은 이미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닌지도 모르지. 그런 세상을 만든 기성세대로서 부끄러움을 안고 아빠는 네게 부탁하고 싶다. 너 혼자서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은 절대로 없다. 하지만 네가 누군가를 안타까이 여기고, 위기에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싶은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만으로, 그리고 작은 손이나마 내밀어주는 그 순간만으로 너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임을 잊지 말아주기 바란다.
※ 이번 호로 ‘김형민 PD의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수고해주신 필자와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김형민(SBS Biz PD)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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