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지는 게 없어도, 그래도 그냥 뛰는 거야 [ESC]
달리기의 기쁨을 오래 몰랐던 건
이유나 목적을 가지고 달렸기 때문
매일 자고 일어나듯 그냥 뛰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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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달리기’를 시작한 지 3년째를 맞이했다. 종종 ‘어떻게 그렇게 매일 해요?’라는 질문을 받곤 하는데, 글쎄, 나도 내가 어떻게 이렇게 하고 있는지 어안이 벙벙할 뿐이라고 답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별다른 부상 없이 매일의 달리기를 지속한다면 곧 1000일째를 맞이한다. 코로나19로 집 밖으로 나갈 일 없던 2021년 3월 어느 날 무심코 시작한 달리기가 매일의 활동으로 이어졌고, 어쩌다 보니 마치 매일 잠을 자고 식사를 하듯 자연스러운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게 된 건 지금도 놀랍다.
달라지는 게 없어도 그냥 뛰는 거야
문화예술계 종사자이자 통번역가, 필자로 생활하다 보니 이따금 피할 수 없는 극단적인 마감 일정이 생겨 집에도 가지 못하고 밤을 새우는 경우를 제외하면, 지난 3년간의 휴대전화 사진첩에서 그 어떤 날이든 달리기 중에 혹은 달리다 잠깐 멈춰 찍어둔 사진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달리기를 하며 찍어둔 사진은 매일 거의 비슷한 장소에서 비슷한 모습을 찍은 것들이다. 출장을 가거나 여행을 떠나지 않는 이상, 달리기 코스는 대개 두세 가지 경로 가운데 하나를 벗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휴대전화 사진첩엔 이렇게 찍어둔 사진이 이미 수천장 저장되어 있다. 매일 두 장만 찍었다고 해도 2천여장에 이른다.
사진첩에 남은 사진들만 비슷한 모습인 건 아니다. 심지어 달리기하는 나 역시 매일 비슷한 옷을 입고 뛴다. 번갈아 입는 반소매 티셔츠 두 벌, 매일 세탁해 입을 요량으로 산 조끼와 재킷, 두 켤레를 번갈아서 신을까 했지만 너무 비싼 탓에 한 켤레밖에 살 수 없었던 가벼운 러닝화 등. 몇 벌 되지 않는 달리기 복장을 추우면 껴입고, 더우면 벗는 식으로 유지하는 중이다. 놀랍게도, 800여㎞를 뛴 운동화 바닥이 더는 신을 수 없을 정도로 닳아서 한 번 새것으로 교체한 것 외에는 아직 달리기 옷 단벌 신사 신세를 벗어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물론 봄부터 가을까지 입는 얇은 타이츠는 마찰에 약한 부분이 닳아 구멍이 났다. 하지만 살짝 기워서 입으면 문제없고, 타이츠 위에 러닝용 쇼츠를 겹쳐 입으니 아직은 괜찮다.
혼자서만 보던 달리기 노트를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시작한 건 어쩌다 시작한 달리기가 작심삼일이나 한 달의 결심으로만 끝날까 덜컥 겁이나서였다. 그런데 이게 웬걸. 이른바 ‘공개선언의 효과’가 발휘된 덕분이었을까? 달리기는 계속되었고, 인스타그램 피드엔 화면을 여러 번 쓸어 넘겨도 끝나지 않을 만큼 기록이 쌓여갔다. 이와 더불어, 주변 사람들이 종종 달리기에 관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렇게 매일 꾸준히 달려요?’ ‘어떻게 하면 달리기를 시작할 수 있어요?’ 혹은 ‘달리면 뭐가 달라지나요?’ 등. 재미있는 건 저마다 달리기가 무엇인지, 달리기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서로 조금씩 다른 생각을 하면서 달리기에 관해 질문을 던지더라는 사실이다.
어른이 되고서도 한참 시간이 지난 어느 날 특별한 목적 없이 ‘그냥’ 달리기를 시작하기 전까지, 내가 생각하는 달리기란 ‘숨이 차는 운동’이나 ‘학창 시절이나 군대에서 억지로 했던 것’에 다름 아니었다. 고등학교 시절엔 전교생이 모두 참여하는 체육대회에서 단축 마라톤에 나갔다 탈수로 쓰러졌고, 군대에선 선임병들이 무서워 가랑이가 찢어지도록 구보를 하다 식사를 다 토한 적도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어찌 보면 누구도 나에게 달리기에 관해 나만의 리듬과 속도로 움직여도 된다는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었다. 달리기는 대개 순위를 매기거나 기록을 세워야 하는 대상으로만 여겨졌던 것 같다.
달리기에 대해 종종 물어보았던 주변 사람들도 역시나 마찬가지였을까? 달리기에 관한 생각은 각자 꽤 다양했지만, 누구도 달리기의 기쁨에 대해서는 선뜻 물어보지 않았다. 아마 다들 달리기에 대해서 그다지 긍정적인 경험이 없거나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달려본 적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어쩌면 무엇을 하든지 이유 없이 행위 자체를 즐기기보다 효능을 찾거나 성과를 내는 데 집중하고, 혼자서 하기보다는 집단의 일원이 되어 함께 임하는 사회 분위기가 여전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최근 몇 년 사이 많은 사람이 ‘러닝 크루’를 만들거나, 러닝 클럽에 가입해 함께 달리고, 마라톤 참여를 위한 기록 향상에 열중하는 건 이런 분위기에서 그나마 건강한 방식으로 달리기를 즐기는 모습들이 아닐까 한다.(인스타그램에서 #달리기 그리고 #마라톤 해시태그를 검색하면 엄청난 수의 포스팅을 볼 수 있다.)
절대적인 나만의 리듬으로
바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도 물어보고 싶다. 당신이 생각하는 달리기란 무엇입니까? 지금 당장 달리기를 하고 싶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나처럼 달리기라고 하면 온통 괴로운 기억뿐이라면, 그저 가볍게 몸을 한 번 움직여보는 셈 치고 지금 당장 잠시 밖으로 나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운동복을 갖추지 않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면, 그것 역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숨이 차서 말도 하기 힘들만큼 어려운 달리기를 할 필요는 없다.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고 있어도 상관없다. 아주 잠깐, 아주 짧은 거리라도 그저 조금 숨이 찰 정도로 두 발이 모두 땅에서 떨어진 상태를 유지해보는 것만으로 시작해도 충분하다. 혹시 집이나 사무실로 돌아가는 중이라면, 버스나 지하철을 한 정거장만 일찍 내려서 가볍게 뛰어도 좋다. 뛰다가 힘들면? 그땐 그냥 걸으면 된다. 누구도 우리가 뛰다가 힘이 들어 걷는다고 해서 뭐라고 할 수 없다. 뭐라고 한들 또 어떤가. 도통 우리 마음대로 되는 일이란 드문 일상에서 가끔은 절대적인 나만의 리듬을 따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런 마음으로, 어디서든 각자의 달리기를 함께 이어 나가보았으면 한다.
박재용 프리랜스 통번역가·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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