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복수극 아닌 ‘우아한 복수’ <더 글로리>의 세계

한겨레21 2023. 1. 14.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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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기획]‘사이다맛 징벌적 정의’ 전형적 구도 깨뜨린 <더 글로리>
가해자 집단 균열과 파멸 유도로 피해자의 시간 되찾아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의 주요 등장 인물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문동은(송혜교), 주여정(이도현), 박연진(임지연), 하도영(정성일), 전재준(박성훈), 강현남(염혜란). 넷플릭스 제공

“또 사적 복수 이야기야?” 김은숙 작가의 신작이 학교폭력(학폭) 피해자가 복수하는 내용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한 질문이다. ‘학폭’을 소재로 한 드라마는 최근만 해도 <돼지의 왕>(티빙), <3인칭 복수>(디즈니플러스), <약한영웅>(웨이브) 등 여러 편 공개됐고, 피해자와 그 주변 인물들이 사적 복수를 하는 서사는 2000년대 이후 한국 드라마에서 빈번하게 반복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은숙 작가가 누구인가. 자타가 인정하는 ‘로맨스 드라마 장인’이 아니던가! 그런 작가가 복수극을? 이 익숙하지만 낯선 조합의 결과물이 어떨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복수는 그저 거들 뿐인 ‘설탕짬뽕’ 같은 로맨스 드라마가 나오는 것은 아닌지 괜한 걱정이 앞섰다. 이런 (쓸데없는) 걱정 속에 드디어 <더 글로리>(넷플릭스)가 공개됐고, 딱 5분만 보려고 1화 플레이 버튼을 눌렀을 뿐인데 어느새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주변에 나처럼 ‘시간 순삭’을 경험한 사람이 속출했다. 심지어 ‘김은숙 작가 작품을 안 좋아하는데 이 드라마는 몰입해서 봤다’는 이도 많았다. 이렇게 <더 글로리>는 바둑돌 놓듯 “침묵 속에서 맹렬하게” 우리를 복수의 세계로 인도했다.

동은이 학교에서 가해자들에게 폭행당하고, 혼자서 괴로워하는 장면. 영상 갈무리

이유 없는 폭력일수록 선명해지는 복수심

자그마치 17년이다. 고등학생이던 문동은(송혜교, 아역 정지소)이 “오늘부터 내 꿈은 너야. 우리 꼭 또 보자”라고 선언한 뒤 자신을 끔찍하게 괴롭힌 가해자들 앞에 다시 서기까지의 시간 말이다. 그 17년 동안 동은은 느리지만 단단하게 복수를 준비했다. 그러기까지 ‘문동은의 시간’은 오롯이 제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가해자인 ‘박연진(임지연,​ 아역 신예은)의 시간’에 가까웠다. 주경야독해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대학에 진학할 때도, 바둑을 배울 때도 동은은 연진을 생각했다.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연진의 딸이 다니는 학교에 부임한 이유도 연진 때문이었다. 17년 동안 동은의 모든 순간은 그렇게 가해자들의 시간에 맞춰져 있었다. 동은에게 복수는 죽지 말아야 할 이유였고, 이루고 싶은 꿈이었다. 그런데 동은의 복수는 왜 ‘목표’가 아니고 ‘꿈’이어야 했을까?

복수극은 그 동기가 명확해야 시청자가 몰입하기 쉽다. <더 글로리>는 그 동기를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게서 발견하게 한다. 가해자들이 동은을 집요하고 끔찍하게 괴롭히는 데는 이유가 없다. 다른 드라마라면 나왔을 ‘가해자도 알고 보니 다른 폭력의 피해자’라거나 ‘사실은 불행한 가정사가 있었다’는 식의 서사가 이 드라마에선 부여되지 않는다. 그저 동은이 거기 있었을 뿐이고, 가해자들은 그런 동은을 괴롭힐 뿐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폭력이 더 잔혹하게 여겨졌다. 가해자들이 동은을 괴롭히는 이유가 불분명할수록 복수 동기도 선명해졌다.

가해자들이 마음껏 폭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무도 동은을 보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침묵과 방관, 폭력으로 가해자들의 공범이 됐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라는 동은의 절규에 “난 이래도 아무 일이 없고 넌 그래도 아무 일이 없으니까. (중략) 아무도 널 보호하지 않는다는 소리야. 경찰도 학교도, 네 부모조차도. 그걸 다섯 글자로 하면 뭐다? 사회적 약자”라는 연진의 대답은 맞는 말이었다.

동은이 학교에서 가해자들에게 폭행당하고, 혼자서 괴로워하는 장면. 영상 갈무리

신마저 가해자의 편일 때

동은에겐 정말 아무도 없었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은 가해자들이 재력가의 자식들이라는 이유로 선처해 동은이 더 잔혹하게 폭력을 당할 빌미를 제공한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최혜정(차주영)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체육교사는 폭력이 일어나는 체육관 열쇠를 아예 혜정에게 넘겨버리고, 담임교사는 동은이 자퇴 사유로 ‘학교폭력’을 명시하자 자신의 승진에 걸림돌이 될까 도리어 동은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동은의 엄마는 담임교사와 연진의 엄마가 제시한 합의금을 챙겨 동은을 버리고 도주한다. 동은에게는 신도 그저 ‘가해자의 하나님’일 뿐이다. 이렇게 고립된 그가 공적 해결이 아닌, 사적 복수를 선택한 건 당연한 일이다.

공적 시스템의 무능력과 무책임, 불의는 결국 피해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거나,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끌어안고 죽은 듯 살게 한다. 그게 아니라면 피해자 스스로 심판자가 되어 정의를 구현할 수밖에 없도록 등을 떠민다. 그래서 사적 복수를 소재로 한 드라마는 대개 ‘사이다맛 징벌적 정의’를 선호한다. 이 징벌적 정의 서사는 분노와 힘을 동력으로 삼아 (초인적) 능력으로 악을 압도하거나(<경이로운 소문>), 마피아 수준의 재력과 힘으로 악을 응징하거나(<빈센조>), 억울한 피해자들의 복수를 대행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의를 구현하는(<모범택시>) 안티 히어로를 필요로 한다.

이렇게 사적 복수 드라마들이 분노와 힘을 매개로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징벌적 정의를 실현했다면 동은의 복수는 다르다. 그의 복수는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가해자들 사이에 균열을 일으키는 우아한 복수다. 정의 실현에 방점을 두지도 않는다. 자신이 타락할 것을 알고, 그럼으로써 지옥에 갈 것도 알지만 할 수밖에 없는 차가운 복수다. (8화까지 공개된 현재까지) 가해자들의 참회나 피해자의 용서 등의 계몽을 시도하지도 않는다. 다만 동은이 제대로 복수하길 응원하듯 복수 과정을 지켜볼 뿐이다.

이런 전개는 그간 우리가 만났던 드라마 속 다른 복수보다 더 피해자 중심적이고 타당한 방식이 아닐까? 우리는 복수를 다짐하는 피해자에게 그를 위한다며 이렇게 말하곤 한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이제는 잊고 네 삶을 살아. 그게 최고의 복수야.” 또는 “넌 잘못한 게 없어? 단 하나도 없어? 이 정도면 너도 문제인 거야!”라는 담임교사의 말처럼 피해자에게서 원인을 찾기도 한다. 이런 말들은 일견 중립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피해자 편에 선 말은 아니다.

동은(오른쪽)은 바둑을 배우면서 “침묵 속에서 맹렬하게” 상대를 조여가는 이치를 터득한다. 영상 갈무리

피해자에게 새겨진 가해자의 시간

피해자의 심정에 공감하려면 그의 ‘시간’을 이해해야 한다. 피해자의 시간은 그렇지 않은 이들의 시간과 다르게 흐른다. 아니 피해를 당한 그 순간에 머무른 경우도 많다. 동은의 몸에 새겨진 흉터가 아직 선명한 것처럼, 그리하여 여름에도 긴팔을 입어야 하고, 여전히 가려움증으로 고생하는 것처럼 피해자에게 새겨진 폭력의 기억은 17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다. 우리는 피해자가 빨리 그 시간에서 벗어나길 원하지만 피해자가 그 시간에서 벗어날 유일한 길은 회복뿐이다. 회복은 어떻게 가능한가? 문제의 해결, 즉 온전한 복수로 가능하다. 공적이든 사적이든 복수해야 비로소 피해의 자리에 멈춰 있던 피해자의 시간이 다시 흘러갈 수 있다.

그렇기에 <더 글로리>가 피해와 복수 사이에 가해자를 향한 이해의 실마리나 참회의 시도, 용서의 가능성을 섣불리 끼워넣지 않고 동은의 복수에 온전하게 집중한 것은 옳은 선택이라 생각한다. 그래야 비로소 동은의 시간이 제대로 흘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더 글로리>의 복수는 쾌감보다는 다소 오래 걸리더라도 피해자의 시간을 존중하며 폭력으로 훼손된 존엄을 회복하려는 이들을 응원하는 복수다.

<더 글로리>가 단지 동은의 복수만 다뤘다면 한계가 뚜렷했을 것이다. 복수는 홀로 감당해야 할 일이지만 혼자만 감당하기 힘든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동은 곁에는 ‘피해자들의 연대’가 있다. 동은은 다른 학생이 피해를 당할 때 방관했기 때문에 다음 피해자가 자신이 됐다는 걸 잊지 않으려 애쓴다. 그렇기에 동은의 복수는 단지 자신만 구원하는 게 아니다. 살해당한 학폭 피해자 윤소희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이며, 여전히 연진의 폭력에 묶여 사는 김경란을 자유롭게 하는 일이다. 또한 동은의 복수는 가정폭력 피해를 당하며 무채색 인생을 살던 강현남(염혜란)이 ‘빨간 립스틱’ 같은 알록달록한 꿈을 꾸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동은의 복수는 피해자들의 연대로 서로를 구원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신을 향한 도발적 질문이자 거룩한 항의이기도 하다. 동은이 학폭 피해를 당한 데는 아무 이유가 없었듯, 생명을 살리는 의사인 주여정(이도현)의 아버지가 살해당하는 걸 목격한 여정에게 닥친 불행도 아무 이유가 없었다. 죄 없는 이가 이유 없이 폭력을 당할 때 신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가해자는 죄책감 없이 잘만 사는데 왜 피해자는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학교폭력이 동은의 몸에 남긴 흉터들. 영상 갈무리

구원의 서사이자 거룩한 항의

<더 글로리>의 복수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바둑이 한 번에 끝나는 승부가 아닌, 몇백 개의 돌이 저마다의 맥락과 관계를 가지는 지난한 싸움인 것처럼, 얽히고설킨 본질적 질문들에 차근차근 대답을 구해(항의하며) 마침내 구원(회복)에 이르는 과정의 문제다. 그렇다면 이 복수는 언제 어떻게 완성될 수 있을까?

“복수는 상대방을 망가뜨리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더라. 네가 너 스스로 오롯이 너 자신의 삶을 살아갈 때 그때 비로소 복수는 완성되는 거야.” 드라마 <모범택시>(SBS)에서 나온 말이다. 이 말이 <더 글로리>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복수가 완성되려면 피해자가 자기 삶을 오롯이 살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하다. 그 계기가 동은에게는 복수인 것이다. 그래서 동은의 복수는 ‘목표’가 아니라 ‘꿈’이어야만 했던 게 아닐까? 가해자의 참회와 용서는 그다음 문제다.

나는 동은과 현남, 여정의 복수가 제대로 성공하길 바란다. 피해자가 모든 걸 잃고 ‘피해자의 시간’을 견뎌야 했던 것처럼 가해자도 ‘가해자의 시간’을 사는 일이야말로 복수의 핵심이며 우리가 풀어야 할 정의의 실마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비로소 동은을 비롯한 피해자들이 피해자의 시간에서 벗어나 “스스로 오롯이”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오수경 자유기고가·<드라마의 말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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