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항일역사 간직 '신한촌 기념탑'의 복잡한 속사정

최수호 2023. 1. 14.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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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기념탑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블라디보스토크=연합뉴스) 최수호 특파원 = '항일 독립운동 성지', '해외 독립운동 상징', '항일·민족운동 전초기지'…

112년 전인 1911년 러시아 극동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시 외곽 야산에 조성됐던 한인 집단 거주지 '신한촌(新韓村)'을 언론 등에서 소개할 때 사용한 표현들이다.

1915년 이곳에 거주했던 한인 동포는 1만 명에 이르렀고 이동휘, 이상설, 홍범도 등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으려는 우국지사들이 집결하면서 항일 독립운동의 요람이 됐다.

많이 알려진 바와 같이 지금은 아파트와 상가시설 등이 들어선 까닭에 옛 신한촌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카야 거리에 있는 '신한촌 기념탑'만이 당시 치열하게 전개됐던 우리 독립운동사를 알려줄 뿐이다.

높이 3.5m가량의 대리석 기둥 3개를 중심으로 건립된 이 시설은 1999년 사단법인 해외한민족연구소가 후원금 3억여 원을 들여 마련했다.

기념탑은 한국 관광객과 현지 러시아인 등이 연해주에 남아있는 우리 독립운동 역사를 배울 수 있는 유적지 탐방 프로그램에도 반드시 포함되는 시설이다.

현지 고려인 후손들에겐 그들의 뿌리를 확인할 수 있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신한촌 기념탑 찾은 러시아인들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하지만 이 지역에 산재한 항일 유적들이 부실하게 관리된다는 목소리는 지난 10년 넘게 꾸준히 제기됐다.

우리 언론 등을 통해 이미 여러 차례 지적됐듯 신한촌 기념탑도 이 가운데 하나다.

기념탑 관리는 시설 건립 초기과정부터 도움을 줬던 블라디보스토크 한 고려인단체 회장이 임의로 맡아왔다.

2019년 그가 별세한 뒤로는 부인이 관리를 대신하고 있다. 남편이 몸담았던 고려인단체는 현재 유명무실한 상태로 알려졌다.

예전부터 기념탑 주변으로는 시설 훼손 방지를 위해 철제펜스가 설치돼 관리인이 자물쇠를 채운 출입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출입이 불가능하다.

이런 까닭에 광복절을 앞두고 이곳을 찾은 한국 단체들이 헌화도 못 하고 발길을 돌린 적도 있다.

최근 이곳을 찾았을 때도 출입문은 자물쇠로 채워져 있고, 탑 상단 등에는 2주 전에 내린 눈이 여전히 쌓여 있었다.

신한촌 추모 묵념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이처럼 신한촌 기념탑 관리 부실 문제는 오랫동안 제기됐지만,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최근 상황을 반영한 변명으로는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사태 등 영향으로 블라디보스토크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 발길이 끊기면서 기념탑에 관심도 줄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표면적인 이유보다 이번 취재로 드러난 그간의 속사정은 매우 복잡했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한국총영사관 등에 따르면 기념탑을 설립한 단체는 명확하지만, 현재 이 시설에 대한 소유·관리 주체는 알 수 없다.

기념탑이 완공 후 현지 당국에 정식 등록된 시설인지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또 최근 들어 확인된 내용이지만 기념탑이 들어선 터가 당초 알려졌던 것과 달리 블라디보스토크시 소유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이에 대해 블라디보스토크시는 "기념탑과 부지 소유주 등을 확인하고 있다"는 입장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기념탑이 당국에 등록된 게 아니라면 '불법 건축물'로 취급돼 최악의 경우 철거될 수도 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일은 한·러 양국 외교 문제와 기념탑이 갖는 역사·관광 자원적 가치 등을 고려할 때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

다만 미등록 시설로 판명 날 경우 지어진 지 24년이 지난 상황에서 누가, 어떤 절차를 밟아 어떤 성격의 시설로 당국에 등록할지가 과제로 남는다.

다행히 기념탑이 당국에 등록된 시설이라면 그 근거를 찾아 지금이라도 소유·관리 주체를 분명히 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든 연해주 지역 우리 항일역사를 기리는 대표 유적지의 법적 지위가 20년 넘게 불명확한 상태로 남아있도록 방치한 것은 분명한 잘못이다.

특히 2016년부터 국내 한 단체가 신한촌 기념탑 정비사업을 추진했다가 불투명한 시설 소유·관리 문제로 중단했던 점을 고려할 때 당시 실태 파악만 제대로 했더라도 이 문제는 더욱 일찍 해결할 수 있었다는 아쉬움도 남는다.

무산된 신한촌 기념공원 조성 계획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그간의 사정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한국총영사관이 해묵은 이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시와 본격적인 협의에 나선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한국총영사관은 현지 법률사무소 등과 기념탑 건립 허가·등록 등 설치 전 과정을 되짚어보고 미비한 점이 발견되면 시설 관련 인물·단체 등과 협의해 보완 절차를 밟을 계획이다. 이후 현지 당국과 적절한 관리방안도 모색할 방침이다.

기념탑을 건립한 해외한민족연구소도 모든 문제가 말끔히 해결돼 체계적인 시설 관리가 이뤄지도록 현지에서 요청이 올 경우 힘을 보태겠다고 밝혔다.

이제 신한촌 기념탑 소유·관리 주체 문제는 우리의 관심으로만 그치지 않을 전망이다.

이번 보도 후 블라디보스토크 현지 매체들도 관련 소식을 전하며 지역에 있는 러시아 외무부 대표사무소 역시 이 사안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과거와 대외 여건이 많이 달라졌지만, 양국 기관 간 협력으로 신한촌 기념비가 하루빨리 제대로 된 지위를 얻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신한촌 기념비 문제 다룬 러 극동 매체 [러시아 얀덱스 홈페이지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su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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