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김밥으로 떼우는 아이들...부모는 “방학이 너무 두려워요” [초보엄마 잡학사전]

권한울 기자(hanfence@mk.co.kr) 2023. 1. 14.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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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겨울방학이 시작됐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초보엄마 잡학사전-176] 유치원에 다니는 작은아이와 평일 오전 11시에 동네 분식집에 갔을 때의 일이다. 김밥을 주문하고 나니 옆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열 살도 안 된 아이들 세 명이 자기들끼리 와서 라면과 김밥을 먹고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과 유치원생 정도로 보였다. 방학을 맞아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들이 끼니를 떼우는 것 같았다. 부모가 맞벌이거나 아니면 큰아이를 믿고 보낸 게 아닌가 싶었다.

사이좋게 김밥을 나눠먹던 아이들의 평화는 막내가 바닥에 물을 엎지르면서 깨졌다. 큰아이는 “너 데리고 밥 먹으러 못 오겠다”고 막내를 나무란 뒤 냅킨 몇 장을 뽑아 바닥을 닦고 또 닦았다. 냅킨으로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아이들을 도와주는 직원은 없었다. 컵만 주워서 테이블에 놓고 밥 먹으라고, 내가 직원에게 도움을 청하겠노라고 하니 큰아이는 연신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몇 년 뒤 내 아이들의 모습과 자꾸 겹쳐 가슴이 먹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막내는 다시 오뎅 국물을 엎질렀다. 큰아이는 다시 냅킨을 뽑아 젖은 옷과 흥건한 테이블을 닦았지만 역부족이었다. 큰아이는 민망한 마음에 자꾸 동생을 나무랐다. 내가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하니 김밥을 먹던 작은아이는 “엄마는 착한 어른이야”라고 말한다. 이제 막 일곱살이 된 아이가 옆 테이블의 난처한 상황을 공감하기라도 한걸까.

바야흐로 겨울방학이 시작됐다. 아이들은 두 달 동안 학교에 가지 않지만, 맞벌이 부모는 매일 아침 어김없이 무거운 발걸음을 일터로 옮긴다. 편의점에서, 분식집에서 김밥이나 라면으로 끼니를 떼우는 아이들의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 중에는 ‘학원 뺑뺑이’를 돌다가 식사시간에 맞춰 밥을 먹는 아이들도 있고, 보호자 없이 하루종일 집에 있다가 잠깐 나와 밥을 사먹는 아이들도 있다.

학교에 돌봄교실이 있지만 모두가 돌봄교실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돌봄교실 추첨에서 탈락한 경우, 파트타임 근무자로 학교에서 요구하는 서류를 제출하기 어려운 경우,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인 경우 등 돌봄교실 이용이 어려운 경우도 많다. 하루종일 회사에 메여있는 맞벌이 부부는 방학이 두렵다. ‘돌밥돌밥’ 삼시세끼 밥 먹이고 학원 챙겨보야 하는 전업주부도 방학이 달갑지만은 않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아이들의 기본적인 식사를 해결해줄 수 있는 공간과 돌봄공백을 메우는 것 이상의 양질의 교육이 당장 어렵다면, 편의점이나 분식집에서 만나는 아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따뜻한 관심과 도움 만으로도 아이들의 움츠린 어깨가 펴진다. 내 자녀라는 생각으로 모두가 각자 스치는 공간에서 아이들의 잠깐의 보호자가 되어준다면 아이들의 하루는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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