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윤치호, 여운형, 이광수는 왜 우생학에 매료됐을까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23. 1. 1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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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1933년 9월 조선우생협회 출범, 송진우 방응모 김성수 김활란 신흥우 등 각계 지식인 85명 발기
윤치호는 1933년 9월 발족한 조선우생협회 회장을 맡았다. 우생학은 당시 우등한 민족으로 거듭나는데 필요한 '과학'으로 인식됐다.

1933년 9월14일 오후3시 남대문의 양식당 ‘치요다(千代田)그릴’에 내로라할 만한 유명인사들이 모였다. 윤치호의 개회사가 끝나자, 베를린대 의대 출신 이갑수(李甲秀)가 모임 취지를 설명했다. 참석자들은 윤치호를 회장으로 선출했다. 이사진엔 여운형, 송진우, 방응모, 유억겸, 김성수, 김활란, 오긍선, 신흥우, 구자옥을 선출했다. 교육계와 언론계, 기독교계를 대표한 인사들이었다. 이날 발족한 단체는 ‘조선우생협회’였다.(’우생학협회 발기’, 조선일보 1933년 9월13일)

◇세계적으로 유행한 우생학

나치의 유태인학살을 떠올리는 우생학은 요즘 입에 올려선 안될 금기어처럼 간주된다. 하지만 20세기 전반 우생학은 세계적으로 유행한 인기 담론이었다. 영국 프랜시스 골턴(1822~1911)이 1883년 제창한 우생학은 인간을 유전학적으로 개량해 우등한 인류를 만들겠다는 취지를 내세웠다. 미국과 독일을 비롯한 서구에서 유행했다. 20세기 들어 일본과 중국, 조선에서도 소개되면서 주목을 끌었다. 하루빨리 부국강병과 근대화를 이뤄 서구 제국을 따라잡는게 지상 목표였던 동아시아에선 더 환영받았다.식민지, 반(半)식민지로 전락한 조선과 중국의 지식인들은 어떻게 하면 정신과 육체가 건강한 민족을 육성해 해방을 쟁취할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발기인 85명중 25명은 의사

조선우생협회는 후대의 육체와 정신을 우생학적으로 개량하여 사회의 행복을 증진케 함을 목적으로 삼았다. 주요활동으로 강연, 토론, 좌담회를 개최했고, 기관지 ‘우생’(통권 3호 발행)을 창간했다.

‘무릇 인간은 유전과 환경의 산물이다. 교육으로써 우리 인류를 좋은 환경으로 인도하는 것을 우경학(優境學)이라 하고, 이와 특이한 점에 있어서 우리 인류의 후세에 전할 수 있는 그 유전적 물질을 개량시키는 것을 우생학이라 한다.’

좌옹 윤치호는 1934년 기관지 ‘우생’ 창간호에 ‘조선 사회에는 이와 같은 운동은 고사하고 사상까지 전혀 없다는 것은 너무나 한심한 일이다’고 썼다. 좌옹은 구한말 독립협회장, 대한자강회장과 외부협판(차관)을 지내고 YMCA 총무와 회장, 조선체육회장을 지낸 거물급 지식인이었다. 우생협회 발기인 85명 중 25명은 의사였다. 잡지 ‘우생’ 주요 필진도 의사나 과학관련 전문가들이 많았다. 우생학은 당시 ‘과학’으로 신뢰받는 신학문,신사상이었다.

영국 학자 프랜시스 골턴(Galton, 1822~1911)은 인류의 질적 개선을 위해 우등한 인간의 출산을 장려하고 열등한 인자를 가진 사람은 도태시킨다는 우생학을 제창했다. 진화론을 창시한 찰스 다윈의 사촌이기도 했다./퍼블릭 도메인

◇우생협회 주도한 베를린의대 출신 이갑수

윤치호 회장 체제에서 협회를 실질적으로 주도한 인물은 총무이사 이갑수(1899~1973)였다. 그는 ‘우생’ 편집인 겸 발행인이었다. 1920년 경성의전을 졸업한 그는 유학을 떠나 1924년 베를린대 의학과를 졸업했다. 베를린대를 정식 졸업한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1926년 귀국한 그는 수송동에서 내과의원을 개업하면서 우생운동을 펼쳤다.

이갑수는 우생협회 발족 전부터 신문, 잡지에 활발하게 기고해 이름을 알렸다. ‘성숙하지 못한 씨앗을 심으면 좋은 열매를 거둘 수없다’며 조혼(早婚)의 폐해를 비유를 끌어대 알기 쉽게 지적했다.

‘아직 신체발육이 완전히 성숙치 못하여 결혼하는 것은 그 남녀 자신의 위생상 또는 발육상 극히 해로운 것이니 이는 비유하야 말하자면 마치 성숙치 못한 종자를 심어 장래에 좋은 과실이 맺힐 나무가 되라는 것과 조금도 차이가 없는 바 ‘싹’이 나오기 전에 그 종자는 썩을 것이요 설혹 나온다 할지라도 완전한 나무가 되지 못할 것이다. 다음에는 그 후계자인 자손이 강건치 못하며 체질이 교약(較弱)하여 여러 가지의 악질(惡質)이 많이 발생할것이니 이는 인류우생(人類優生)에 대(對)한 적(敵)이될것이다’(‘의학상 결혼관-早婚은 절대로 유해’,조선일보 1930년 11월26일)

이갑수는 ‘의학상 결혼관’(조선일보 1930년11월26일~12월16일)이란 제목으로 우생학 관점에서 결혼, 임신, 출산, 성교육 지식을 19차례나 연재했다.

조선우생협회 발족을 알리는 조선일보 1933년 9월 13일자 기사

◇'우생학으로 본 산아제한’

우생협회 발족 직후인 1933년 9월 신문에 연재한 ‘우생학상으로 본 산아제한’(조선일보 1933년 9월27일~28일, 10월1일)은 요즘 분위기로 치면 그대로 옮기기도 민망하다. 폐질자나 정신병자 등 유전적 결함이 있는 사람의 결혼과 출산을 법률로 제한하자는 얘기부터 사회에서 영원히 격리해야 한다는 일부 우생학자의 주장까지 소개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도 ‘종교와 도덕이 있는 이상에는 절대로 그 주장을 용서할 수없다’고 썼다. 그러면서도 ‘난치의 폐질을 가진 두 남녀일지라도 정정당당히 결혼하야 보통 사람들과 같이 성욕의 만족을 채우게 하지만 그 부부로 하여금 자손까지 번식케한다는 것은 결코 찬성할 수없다’고 했다.

◇해방 후 초대 보건부차관

우생협회는 1937년 사실상 활동을 정지했지만 이갑수는 광복후인 1947년10월15일 ‘한국민족우생협회’를 발족시켜 활동을 이어갔다. 유억겸을 회장에 추대하고, 이갑수는 총무를 맡았다. 발족식에는 이승만과 이범석이 참석해 각각 ‘민족우생에 대한 정치적 견해’ ‘민족우생과 청년운동’이란 제목의 강연까지 했다. ‘민족 우생’ 슬로건은 여전히 대중에게 인기있는 주제였던 모양이다.

1949년 사회부 보건국이 보건부로 독립하면서 초대 보건부 차관이 됐다. 초대 보건부 장관도 우생협회 발기인이었던 구영숙이었다. 구영숙은 취임과 함께 한센병 박멸을 주요 방침으로 발표하면서 이들을 소록도에 버금가는 외딴 섬들에 격리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이갑수는 1950년 12월까지 보건부 차관으로 일했는데, 재임중 우생법령을 제정하지 못한 걸 아쉬워했다고 한다. 우수한 한국인을 만들기 위해선 우생 결혼과 강제적 단종수술이 필요하다는 소신을 평생 간직한 것이다.

우생학이 옛날 일이라거나 홀로코스트 영화에나 나오는 얘기라고 생각하면 현행 ‘모자보건법’을 한번 보시길. 모자보건법 제14조는 본인이나 배우자에게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거나 대통령령이 정하는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임신중절 수술을 할 수있게 규정했다. 우생학은 여전히 살아있다.

◇참고자료

신영전, ‘미수 이갑수의 생애와 사상: 우생 관련 사상과 활동을 중심으로’, 의사학28-1, 2019

장성근, ‘1920~1930년대 조선 우생주의자의 유전 담론 연구, 성공회대 석사논문, 2015

이정선, ‘이갑수, ‘세계적 우생운동’, 개념과 소통제18호, 2016,12

이영아, ‘식민지기 여성의 몸에 대한 우생학적 시선의 중층성’, 사회와 역사 제135집, 2022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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