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기용까지 간섭?' 흥국생명, 월드클래스 품을 자격 스스로 지웠다[스한 위클리]
[스포츠한국 허행운 기자] '배구여제' 김연경(35)의 복귀와 함께 연일 행복한 비명을 지르던 V-리그 여자부에 예기치 못한 재앙이 찾아왔다. 재앙의 중심은 하필 김연경이 소속된 흥국생명 구단이다. 구단 내부 단장-감독 간 갈등이 도화선으로 작용했고, 파급력은 리그 전체까지 미치고 있다.
V-리그 여자부 최다 우승(4회)에 빛나는 '명가' 흥국생명은 지난 시즌 6위 수모를 겪었다. 신생팀이었던 페퍼저축은행만이 그들의 아래에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흥국생명은 이내 그 충격을 극복해냈다. 새 시즌을 앞두고 단행한 사령탑 교체와 김연경의 국내 유턴이 맞물리면서다. 당초 리빌딩이 예상됐던 흥국생명은 단숨에 우승후보까지 거론됐다.
흥국생명은 성적으로 우승후보임을 입증했다. 새해가 되기 전까지 치른 18경기에서 14승 4패, 승점 42점으로 순항해 1위 현대건설의 뒤를 바짝 쫓는 2위를 굳게 지켰다. 2022년 마지막 경기였던 지난달 29일 현대건설 마저 3-1로 이겼다. 흥국생명의 계묘년은 내친 김에 1위까지도 넘볼 수 있는 해로 보였다. 그러나 재앙은 불시에 찾아왔다.
▶ 감독의 돌연 사퇴부터 구단 공식 사과까지…9일의 기록
지난 2일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흥국생명의 임형준 구단주가 "구단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부합하지 않아 부득이 권순찬 감독과 헤어지기로 결정했으며, 김여일 단장도 동반 사퇴키로 결정했다"고 발표한 것.
우승을 두고 다투던 사령탑의 느닷없는 사퇴 소식에 배구계는 발칵 뒤집어졌다. 그리고 권 전 감독이 지상파 방송국과의 인터뷰를 통해 김여일 전 단장의 선수 기용에 관한 '문자 지시'를 폭로했다. 젊은 선수 활용, 로테이션 등 세부내용에 대한 간섭으로 알려지면서 이슈는 증폭됐다. 감독의 고유 권한 침범은 분명 중대한 문제였다.
구단은 이를 반박했다. 지난 5일 GS칼텍스전을 앞두고 취재진을 만난 신용준 신임 단장은 "선수 기용이 아닌 선수단 운영에 대해 문제가 있었다"며 "의견 대립이 많다보니 구단주께서 동반 사퇴를 시킨 것"이라 설명했다.
그러나 이 의견은 신뢰를 얻을 수 없었다. 바로 그날 승리 인터뷰를 가진 김연경이 "선수 기용에 대한 얘기가 있던 것은 사실이다. (구단이) 원하는 대로 했다가 몇 번 진 경우가 있었다"고 폭로했기 때문. 그는 "개인적으로 납득되지 않는다. 회사가 말을 잘 듣는 감독을 선호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라며 공개적으로 비판하기까지 했다.
감독대행으로 선임된 이영수 수석코치도 딱 1경기만 치른 채 곧바로 사의를 표명해 간접적으로 김연경의 메시지에 힘을 실었다. 구단은 이어진 6일 김기중 신임 감독을 선임하며 진화에 나섰지만 이미 배구 팬의 분노는 끓어올랐다. 일부 팬들이 "선수 기용 개입은 명백한 월권, 갑질하는 흥국생명 구단주 OUT"이라는 메시지가 적힌 트럭 시위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 때문이었을까. 김 감독은 8일 화성 IBK기업은행전을 앞두고도 선수단과 상견례도 하지 않았고, 본 경기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김대경 코치가 감독 대행으로 경기를 치르는 촌극이 발생했다. 몸상태가 좋지 않은 김연경은 웜업존에서 후배들을 독려하며 승리를 챙겼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결국 지난 10일 흥국생명은 백기를 들었다. 구단은 "최근의 사태는 배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경기운영 개입이라는 그릇된 방향으로 표현된 결과"라며 감독의 고유 권한 침범 사실을 자인했다. 이어 "앞으로 경기운영에 대한 구단의 개입을 철저히 봉쇄하고 감독의 고유 권한을 전적으로 존중할 것"이라 다짐했다. 구단이 고개를 숙이기까지 걸린 시간은 권순찬 전 감독 사퇴로부터 딱 9일이다.
▶ '기피 대상 1순위' 아무도 잡기 싫은 흥국생명 지휘봉
구단의 소방수로 낙점 받은 김기중 감독도 자연스레 자리를 내려놨다. 김 감독은 구단을 통해 "배구계 안팎에서 신뢰를 받아도 어려운 자리가 감독직인데, 여러 가지 오해를 불러올 수 있는 현 상황은 부담이다. 지금 감독직을 수행하는 것은 그동안 노력해 준 선수단과 배구 관계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며 사의를 표명했다.
흥국생명은 이제 총체적 난국에 빠졌다. 김기중 전 감독의 표현인 "여러 오해를 불러올 수 있는 상황"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과문을 통해 구단의 개입을 인정하고 반성의 뜻을 내비친 것은 맞지만 사실 바뀐 것은 없다. 구단의 입맛에 맞지 않았던 권순찬 전 감독만이 허무하게 코트를 떠났을 뿐이다.
이 상황에서는 누가 차기 사령탑이 돼도 팬들은 신뢰할 수 없다. 고르고 골라 입맛에 맞는 반찬을 선택했다는 의구심을 그 누구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자리를 과연 누가 앉으려고 할까. 사실상 흥국생명의 사령탑은 '기피 대상 1순위'가 됐다 해도 진배없다.
일단 흥국생명은 시즌 내내 선수단과 함께해온 김대경 코치가 감독대행으로서 남은 시즌을 치른다. 그 누구도 데려올 수 없는 현실이 씁쓸할 흥국생명이다. 그들이 자초한 결과기에 탓할 곳도 없다. 지금은 어떤 감독을 데려올지에 앞서 먼저 해결해야할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잘 생각해봐야 할 때다.
▶ 상처입은 선수단과 한숨 내쉬는 팬들… 아픔은 모두 그들의 몫
가장 큰 피해자는 매 경기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나아가 우승을 목표로 긴 시간을 쏟는 선수단과 코칭스태프 그리고 그들의 땀과 열정을 응원하는 많은 흥국생명 팬들이다. 삽시간에 선장을 잃어버린 선수단과 스태프들은 이제 오롯이 자신들의 힘으로 이 배를 끌어가야 하는 난제에 부딪혔다.
지난 5일 김연경과 함께 승리 인터뷰를 가졌던 김해란은 "저를 포함해 선수들도 사실 다 알고 있었다. 마음 상한 선수들도 있었고 저도 (권순찬) 감독님께 마음이 상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1984년생의 팀 최고참 리베로마저도 멘탈적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는 거대한 외풍임에 틀림없다.
시즌이 아직 절반가량 남았음에도 벌써부터 이번 시즌을 마치고 프리에이전트(FA) 자격을 얻는 김연경의 거취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도 이 같은 이유다. 대내외적 신뢰를 잃어버린 흥국생명은 김연경과 같은 대한민국 배구의 아이콘을 품을 수 없는 팀임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팬들이기에 분노를 유발시키는 구단의 행태에도 불구하고 인천 삼산체육관을 찾아 선수단에게 뜨거운 응원을 불어넣고 있다. 하지만 선수들과 팬들 가슴에 생긴 생채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흥국생명의 남아있는 시즌에도 가시밭길이 예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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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한국 허행운 기자 lucky@sportshank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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