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백호가 외치는 “영감님!” 듣기 위해… 33년만에 더빙 영화를 봤다
3040이 바꾼 극장 풍경
지난 10일 영화관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본 영화는 ‘아바타’였지만, 확보한 상영관 대비 관객이 가장 많았던 영화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였다. 지난 4일 개봉한 이 애니메이션은 개봉 6일 만에 50만 관객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2위, 좌석 판매율 1위에 올랐다.
영화는 일본 고교 농구부 주장이었던 이노우에 다케히코 작가가 1990년부터 6년간 연재한 만화 ‘슬램덩크’를 바탕으로 한다. 국내에선 1992년부터 ‘주간 소년 챔프’를 통해 연재됐고, 1998년엔 SBS에서 TV 만화로 방영됐다. 한국에서만 만화책이 1450만부가 팔리는 등 1970~1980년대 출생한 이들에겐 첫사랑과도 같은 작품이다.
영화는 여러 면에서 기존 영화관의 공식을 바꾸고 있다. “1만3000원으로 탑승하는 타임머신” “다시 봐도 좋은 세기의 명승부”란 평과 함께 30·40대 남성이 극장에 몰리면서다. 11일 CGV에 따르면 남성 관객(62.6%)이 여성 관객(37.4%)을 넘어섰고, 30대(43.6%)·40대(34.9%)가 가장 많이 봤다. 개봉 첫 날 홀로 영화관에 온 비율도 49.8%에 달한다. 만화 주인공들처럼 북산고 농구복을 입고 조던 운동화를 신은 관객도 있었다. 이뿐 아니다. 지금까지 더빙 영화는 아직 우리말 읽기가 익숙지 않은 미취학 아동과 그 가족이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 더빙 영화가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 사이에 몰려 있는 게 이런 이유다.
그러나 퇴근 후 더빙판을 보고 싶다는 30~40대 팬들의 요구가 쏟아지면서, 지난 9일부터 더빙판 상영관이 크게 늘었다. 저녁 7시부터 밤 10시까지 황금 시간대는 물론이고, 새벽 1시 이후 야간 개봉도 한다. 배급사인 뉴(NEW) 임성록 과장은 “성인을 대상으로 한 기존 애니메이션의 경우 자막판 상영 비율이 훨씬 높지만,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30·40대 관객의 더빙판 요구가 높았다”며 “이를 반영해 자막과 더빙판의 비율을 5.5:4.5 정도로 조정해 더빙판 상영을 확대하고 있다”고 했다.
◇“왼손은 거들 뿐” 우리말로 듣기 위해
직장인 김모(42)씨는 지난 7일 33년 만에 더빙으로 영화를 봤다. 주인공 강백호가 감독님을 부르는 말, “영감님!”을 우리말로 듣고 싶어서다.
이 만화가 한국에 처음 소개된 1992년은 일본 대중문화가 한국에 정식 개방되기 전이었다. 일본식 이름과 지명을 그대로 쓰면 안 된다는 심의 규정이 있었다. ‘강백호’ ‘서태웅’ 등 주인공 이름은 물론이고, ‘북산고’ 등 대부분 고유명사를 한국식으로 바꿔 표현해야 했다. 덕분(?)에 슬램덩크는 일본 만화지만 현지화가 잘된 대표적 작품으로 꼽힌다. 당시 추억을 간직한 30·40대가 슬램덩크 더빙판을 선택하는 이유다.
김씨는 “어렸을 땐 슬램덩크가 일본 만화인 줄 알면서도 주인공들이 정말 한국 어딘가에서 사는 형들이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읽었다”며 “주인공 이름뿐 아니라 ‘왼손은 거들 뿐’과 같은 명대사도 우리말로 듣고 싶었다”고 했다. “1990년 KBS에서 해준 ‘백 투 더 퓨처’ 이후 더빙으로 된 영화를 본 건 정말 오랜만인데,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강백호가 부상에도 포기하지 않고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난 지금입니다’를 외칠 때 울컥 눈물이 날 뻔했다. ‘중꺾마(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의 원조가 강백호였던 셈이다.”
그래서 영화를 기획할 때 중요하게 생각했던 점이 성우였다. 해당 세대의 추억과 너무 이질적인 목소리가 나오면 몰입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선 과거 슬램덩크 애니메이션 녹음을 했던 성우 대신, 새 성우들이 영화에 투입된다는 소식에 개봉 전 ‘별점 테러’가 이어지기도 했다.
국내에선 강수진, 신용우 등 내로라하는 성우들이 모두 오디션을 통해 발탁됐다. 과거 TV 만화에서 강백호 역을 맡았던 강수진 성우는 이번에도 강백호 역을 맡았다. 국내 개봉 전 북산고 주전 5명의 목소리를 맡은 성우진은 마치 아이돌 데뷔 멤버를 선보이듯 한 사람씩 공개됐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국내 기획·마케팅을 맡은 이노기획 김도희 실장은 “슬램덩크에 열광하는 세대는 더빙에 대한 향수가 있어, 극장판으로 개봉하면 이 부분에 대한 기대가 클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1만3000원에 타는 ‘타임머신’
잘 만들어진 영화는 타임머신과 같은 역할을 한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첫 장면이 그렇다. 1990년대 만화책을 본 이들이라면 이노우에의 러프 스케치와 함께 북산고 주전 5명이 걸어나오는 장면에서 콧등이 시큰할 것이다. 개봉 첫날 영화를 봤다는 직장인 이모(40)씨는 “온몸에 전율이 느껴지면서 한순간에 20여 년 전으로 돌아가는 듯했다”며 “주인공들이 ‘안녕? 반갑다. 잘 지냈지’ 하며 인사를 건네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이씨에게 슬램덩크는 청춘의 표상이자, 학창 시절을 함께 한 친구였다. “소년 챔프에 연재되는 만화를 챙겨 보고, 단행본이 나올 때면 만화책방으로 달려가 읽었다. 너무 인기가 많아 순서가 올 때까지 며칠을 기다리기도 했다. 취직하고 스스로 돈을 벌면서 슬램덩크 전질을 살 수 있어 뿌듯했다.”
회사원 윤모(38)씨도 아내와 함께 영화를 보면서 최근 시간여행을 했다. 윤씨는 “중학교 때 성적이 떨어지자 아버지가 슬램덩크 만화책을 죄다 불태웠던 일을 아내에게 얘기해주면서 서로 한참 웃었다”고 했다. 그는 가수 박상민이 SBS 만화에서 부른 슬램덩크 주제가 ‘너에게 가는 길’도 요즘 반복해서 듣고 있다. “이제 나는 꿈 많은 10대에서 평범한 회사원으로, 또 농구 전반전조차 뛸 수 없는 체력이 됐지만, 아직 10대인 그 형들은 여전히 늙지 않고 그 자리에서 농구를 하고 있더라.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반가웠다.”
슬램덩크의 인기는 서점가로도 번지고 있다. 인터넷서점 예스24에선 새해 첫날 베스트 셀러 1위에 ‘슬램덩크 챔프’가 올랐고, 알라딘에선 기존 슬램덩크 단행본 판매량이 전년 대비 3배 이상 급증했다. 이번 주말 슬램덩크를 볼 예정이라는 직장인 송모(47)씨는 “이민 갔던 베프(베스트 프렌드)를 만나러 가는 기분”이라고 했다. 다만 어렸을 땐 혼자 만났던 친구를 이번엔 남편, 자녀와 함께 만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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