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도 CEO도 “급여 더 올리자”… 마르크스도 놀랄 日임금인상 열풍

장부승 일본 관서외국어대 국제관계학 교수 2023. 1. 14.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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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장부승의 海外事情]
노동계 인상안도 훌쩍 넘겼다
日이 임금 올리는 진짜 이유는
일러스트=한상엽

여기가 자본주의 국가 맞나? 요즘 일본에선 자본주의 사회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자본론>의 저자 칼 마르크스가 지금의 일본을 본다면 아마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지도 모른다.

조짐은 이미 지난 10월 관측됐다. 작년 10월 26일 일본 최대 경제 신문, 니혼케이자이(日本経済, 닛케이)가 사설을 썼다. 물가가 급등하는 만큼 근로자들의 임금을 올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닛케이는 노조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했다.

당시 일본의 노동자 총연합조직인 렌고(連合,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는 춘계 노사 교섭 가이드라인으로 5% 임금 인상을 제시한 상태였다. 5% 인상 요구도 28년 만에 있는 일로 이례적이었다. 보통은 렌고가 4% 정도 요구하면 2% 내외에서 임금이 올라가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 관례를 깨고 5%를 요구했는데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닛케이신문은 통상 기업인들의 관점에서 기사를 쓰는 것으로 알려진 신문이다. 그런 신문이 임금을 올리자고 하고, 노동자들에게 임금 협상을 더 적극적으로 하라고 조언을 한다? 일본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타(赤旗)가 할 일 아닌가?

더 희한한 일들이 올해 들어 이어졌다. 1월 4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기시다 총리는 중대 발언을 했다. 금년도 최우선 정책 목표로 임금 인상을 내건 것이다. 기시다는 구체 가이드라인까지 제시했다. 물가상승률을 뛰어넘는 임금 인상을 실현해달라는 것이다. 작년 4/4분기 이후 일본 경제는 3%가 넘는 물가상승률을 기록 중이다. 11월 소비자물가지수는 전년 동기 대비 3.7%를 기록했다. 40년 만의 최고치다. 3%대를 넘으려면 최소 4%는 임금을 올려줘야 한다.

자본주의 국가의 정부 수반이 사인 간 계약 사항인 임금에 대해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운영 원리에 비추어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데 여론의 반응이 나쁘지 않다. 나쁘기는커녕 일본 방송사들은 앞다투어 대기업 최고 경영자들에게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상당수 기업 경영자들이 긍정적인 신호로 화답했다. 일본 최대 음료 업체 중 하나인 산토리 사장이자 대표적 경영자 단체인 경제동우회 차기 대표 간사로 내정된 니이나미 다케시(新浪剛史)는 6% 인상 방침을 밝혔다. 일본 최대 생명보험사인 니혼세이메이(日本生命)의 쓰쓰이 요시노부(筒井義信) 회장은 5만명에 달하는 영업사원에게 7% 임금 인상을 약속했다. 일본 최대 석유화학 플랜트 제조업체인 닛키(日揮)는 무려 10% 인상을 공언했다. 니이나미 사장은 심지어 물가 상승으로 생활고를 겪는 근로자들에게 임금을 올려주지 못하는 기업인은 경영자로서 자격이 없다는 말까지 했다.

카를 마르크스에 따르면 임금 인상은 자본가의 요구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자본가는 근본적으로 착취 계급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이론에서 경제적 가치는 오로지 노동에 의해서만 창출되며 자본가는 이 노동 가치를 착취함으로써만 이익을 얻는다고 한다. 그러니 노동과 자본은 근본적으로 적대 관계에 설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가? 일본 공산당은 줄기차게 임금 인상을 외쳐 왔다. 작년 11월 28일 일본 공산당 대표로 중의원 예산위원회 질의에 나선 다무라 다카아키(田村貴昭) 의원은 기시다 총리를 몰아붙였다. 공세의 예봉은 단연 임금 인상. 다무라 의원은 특히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실질 급여가 일본을 앞서고 있음을 도표를 들어가며 지적했다.

기시다 총리의 연두 기자회견을 보면 묘하게도 다무라 의원의 발언과 입이라도 맞춘 듯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빠르게, 큰 폭으로 임금을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의 최대 보수 정당과 최장수 좌파 정당이 한목소리를 낸다? 분명 카를 마르크스가 놀랄 일이다.

희한한 일들이 벌어지는 이유는 일본이 지난 20여 년간 사실상 임금 정체 상태였기 때문이다. 월급이 안 올라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물가도 안 올랐기 때문이다. 이제 물가가 오르는데 막대한 정부 부채로 금리 인상은 못하니 남는 대안은 임금 인상뿐.

게다가 일본의 다수 전문가들은 최근의 엔화 약세와 물가 상승이 오히려 일본 경제 구조 개혁의 기회라 보고 있다. 장기에 걸친 엔고와 디플레이션으로 인해 일본 기업들은 생산 기지를 해외로 이전했다. 이제 엔화 약세와 물가 상승을 배경으로 국내 생산 기반을 재구축하겠다는 것이다. 국내 생산성을 높여 기업 이윤율을 높이고 이를 기반으로 다시 임금을 올리는 이른바 경제의 선순환 구조를 이룩하겠다는 계획인 것이다.

이 계획의 핵심 고리가 바로 임금 인상이다. 임금 인상을 통해 수요를 확대하고 동시에, 성과를 내는 근로자에게 확실한 보상을 지급함으로써 근로 의욕과 창의성을 고취하여 장기적인 노동 생산성 제고의 기반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이 원대한 계획이 성공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좌우 정당들이 이념 갈등을 넘어 한목소리를 내고, 기업인들이 근로자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임금 인상을 주도하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는 일본의 현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난 세기에 만들어진 낡은 이념들로 우리가 현재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19세기를 살았던 카를 마르크스가 오늘 살아 돌아와 현대 일본을 본다면 정말 깜짝 놀랄까? 아니, 그는 오히려 새로운 현실에 맞춰, 그의 주저 자본론을 새로 쓰겠다고 할지 모른다. 이론은 언제나 현실을 묘사하고 인도하는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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