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시대의 산물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이었던가, 우연히 종씨(청주 한씨) 인사들이 국무총리 자리에 세 번 연속으로 오르는 일이 있었다. 당시 정부에 꽤나 부정적인 입장이셨던 아버지셨지만 이때만큼은 흐뭇한 미소와 함께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청주 한씨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을 세 번이나 배출했구나.”
조선왕조가 문을 닫은 지 100년이 다 되어가던 시점에서 아버지의 말씀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1940년대생이신 아버지는 광복 이후의 기억밖에 없으실 분이다. 애초에 영의정이니 임금이니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를 사셨음에도 그분의 인식은 조선 시대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1940년대생들의 부모는 1910·1920년대생 분들이고 조부모들은 1880·1990년대 분들이다. 1940년대 어른들이 성장기를 보냈을 1950년대는, 전쟁의 상흔과 함께, 보통 3대가 한집에 살았던 시기였고 일에 바쁜 부모 세대보다는 조부모 세대의 가치관이 손자들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들이야말로 실제로 조선 시대를 사신 분들이다.
무슨 이야긴가 하면 사람은 자신이 태어난 시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다. 어린 시절의 경험은 성인기 이후의 가치관을 결정짓는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프로이트의 견해를 100% 따르지 않더라도 부모님과 조부모님, 주변 사람들에게 보고 듣고 배우는 내용들을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의 경험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편이 무리일 것이다.
생존의 방식을 터득한 기성세대가 자신들의 깨달음을 후속 세대에 전달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전달된 가치들은 후속 세대의 마음속에 내사(introjection)되어 사회는 유지되고 문화로 이어진다. 심리학에서는 내면화(internalization), 사회학에서는 사회화(socialization)라 부르는 과정이다.
1960년생인 윤석열 대통령이 성장한 1960년대는 한국이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발을 내딛던 시점이었다. 1962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어 논밭을 갈아엎은 곳에 공장들이 들어섰고, 모 내고 밭 갈던 사람들이 공장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1970년, 청계천의 한 피복공장 노동자가 자기 몸에 불을 붙이기 전까지는 작업조건이니 노동자의 권리 같은 것은 꿈조차 꿀 수 없는 시대였다.
교수 부모님 슬하에서 부족함 없이 청소년기를 보내고 9년 동안 사법고시를 준비하며 1980년대를 보낸 그가 노동에 대해 어떤 생각을 키워왔을지는 현 정부의 노동정책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대선 후보 시절부터 주 120시간 노동을 언급하더니 지금은 개혁이라는 명목으로 주 69시간 노동을 밀고 있다. 총 노동시간 내에서 유연하게 조절한다지만 직장생활을 해본 이들이라면 이 말이 얼마나 이루어지기 어려운 일인지 알 것이다.
지난해 말 발표한 OECD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노동시간은 연간 1915시간으로, OECD 38개 회원국 중 5위를 기록했다. OECD 전체 평균 노동시간은 1716시간으로, 한국은 OECD 평균치보다 199시간을 더 일한 셈이다. 통계가 잡히기 시작한 이래 한국의 노동시간은 늘 OECD 1, 2위를 다퉈왔다.
한국이 세계 최장 수준의 노동시간을 유지해 온 것은 그동안 성장을 최고의 가치관으로 삼아왔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36년의 수탈과 곧이은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나라를 일으키려면, 자식들을 굶기지 않으려면 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야근이 당연하고 주말도 없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을 살아온 사람들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2023년이고 세상은 그동안 변했다.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세계와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으려면 더 많이 일해야 한다는 생각은 산업화 시대의 산물이다. 산업이 궤도에 오르기 전의 어느 시점까지는 맨땅에서 일어난 후발주자로서 경제성장의 기반을 만들기 위해 오래 일해야 했을 수 있다. 하지만 IMF가 선정한 세계 10대 선진국, 2022년 미국 US뉴스 월드리포트가 꼽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6위인 한국이 생산성이 떨어져서 오래 일해야 한다는 주장은 어떤 관점에서 보아도 시대착오적이다.
사람은 자신이 성장한 시대와 자라온 환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현실에 굴복하거나 주어진 조건에 순응하지 않고 실존의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특히나 대의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밑그림을 그릴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는 사람들이 있다.
한민 문화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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