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칙 무시한 극우 강경파 ‘탈레반’이 나라 뒤흔들어
극단의 정치 득세하는 미·브라질
지난 1일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룰라)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권력의 추가 우에서 좌로 이동한 브라질에선 정권 교체 일주일 만인 지난 8일 희대의 정치적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AP·AFP·로이터 통신 등에 따르면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 지지자들은 연방의회·연방최고법원과 대통령 관저가 모인 수도 브라질리아의 삼권(三權) 광장을 점거한 뒤 대규모 시위·폭동과 파괴 행위(반달리즘)를 벌였다. 이들은 지난해 10월 결선투표에서 50.9% 대 49.1%라는 근소한 표차로 보우소나루가 패한 대선 결과에 불복하고 폭동으로 세를 과시했다.
브라질과 미국에서 벌어진 이 같은 정치적 혼돈은 법·규범·원칙·공동체보다 권력·당파성·포퓰리즘에 사로잡힌 세력이 나라를 뒤흔들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일요신문인 옵서버의 윌 허튼 칼럼니스트는 지난 8일자 칼럼에서 미국 하원에서 의장 선출을 방해한 의원들을 ‘탈레반 20’으로 불렀다. 허튼은 “각국 정당들은 제어하기 힘든 (정치적) 반항아들을 내부에 품고 있다”며 “이들은 파벌을 형성하고 다수결 원칙이나 규범·리더십, 심지어 법률까지 무시하면서 정부나 정당을 제멋대로 이끌려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허튼은 지난해 1년 동안 각각 3명의 총리와 내무부 장관, 각각 4명의 재무부·보건부 장관, 5명의 교육부 장관을 경험한 영국도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소수 정파의 이념적 편파성과 정파 이기주의, 나만 옳다는 생각, 대화와 타협을 모르는 고집 탓에 정국이 마비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다.
프랑스 국제방송 프랑스24에 따르면 지난 8일 브라질리아 삼권 광장에 모인 4000여 명의 시위대는 약속이라도 한 듯 노란색의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 유니폼을 착용하거나 국기로 몸을 감싸고 점거·파괴 행위에 나섰다. BBC 방송은 광장 한편에선 전국에서 온 100대 이상의 대형 버스가 전날부터 정차해 있었다고 전했다. 이들은 인근 군사령부 앞에서 텐트를 치고 시위를 이어가던 200여 명과 합류한 뒤 광장으로 행진했다. 시위와 폭동이 사전에 치밀하게 조직됐음을 시사하는 정황들이다.
이날 브라질리아를 비우고 수해 지역을 방문했던 룰라는 경찰 대응만으론 역부족임을 느끼고 결국 군을 투입해 진압에 나섰다. 독일 국제방송 DW에 따르면 룰라는 이번 폭동을 “광신적인 파시스트의 만행”이라고 비난하며 “모든 법을 동원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로사 웨버 브라질 대법원장은 이들을 ‘테러리스트’로 불렀다. 브라질 내무부와 법무부는 1500여 명을 구금하고 400여 명을 체포했다고 밝혔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도 “민주주의와 평화적 권력 이양에 대한 공격”이라며 시위대를 비난했다. 룰라 대통령은 배후에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보우소나루는 이를 부인한 뒤 “평화적 항의를 할 권리를 옹호한다”며 시위대를 지지했다.
미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지난 12일 보우소나루 지지자들이 벌인 브라질 폭동은 지난해 1월 6일 미국 워싱턴DC에서 벌어진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 지지자들의 의사당 난입과 폭력 사태를 떠올리게 한다고 전했다. 자신들의 지지 후보만 정당하다고 믿는 ‘광신적’ 집단이 투표 절차와 다수결 원칙, 법·규범 등을 무시하고 폭력을 통해 선거 결과를 뒤집으려고 시도했다는 점에서다. 소수가 그릇된 믿음으로 공동체를 무질서와 혼란으로 이끌었다는 얘기다.
뉴욕타임스(NYT)와 워싱턴포스트(WP) 등에 따르면 미 하원의장 선거를 뒤죽박죽으로 만든 ‘프리덤 코커스’는 민주당 출신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 재임 때인 2015년 1월 공화당 지도부를 더욱 우경화한 인물로 교체할 목적으로 설립됐다. 초대 회장인 짐 조던은 프리덤 코커스를 “더 작고, 더욱 결속력 있으며, 보다 기민하고, 더 활동적인” 공화당 보수 그룹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시사잡지 타임은 당시 이들을 두고 “공화당의 미래를 바꿀 수도 있는 반항아”라고 표현했다. 여론조사 기관 퓨리서치는 이들의 정치적 성향이 공화당에서도 가장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의원들의 이념적 성향을 ‘가장 진보(-1)’부터 ‘가장 보수(+1)’까지로 나눌 때 중간값이 민주당은 -0.409, 공화당은 +0.459이었는데 프리덤 코커스 회원들은 +0.691로 나타났다. 이념 성향이 우익을 넘어 극우에 가깝다는 의미다.
가디언에 따르면 이들은 감세와 정부 지출 감소를 강조하는 재정적 보수주의, 낙태·성소수자에 부정적인 사회적 보수주의 등을 주장하며 반이민자 성향에 기후변화도 반대하고 있다. 이는 ‘트럼피즘’과 이념상 거의 일치한다. 실제로 프리덤 코커스에는 트럼프 지지자가 상당수 포진해 있어 차기 대선에 트럼프가 출마할 경우 시너지 효과를 통해 세력이 더욱 확대될 여지도 충분하다. ‘극단의 정치’ 시대가 열릴 가능성이 상존하는 셈이다.
문제는 이번 하원의장 투표 혼란에서 보듯 프리덤 코커스가 소수 정파임에도 공화당은 물론 하원 전체를 마비시키거나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당과 의회 지도부를 압박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줬다는 점이다. 하원을 장악한 공화당이 소수 극우 성향 정파의 손에 이끌려 더욱 우경화할 우려가 커지는 이유다.
이는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적잖은 우려를 낳고 있다. 당장 우크라이나 지원 예산부터 외국을 위해 미국 돈을 쓰는 걸 탐탁해 하지 않는 이들의 견제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이번 투표에서도 프리덤 코커스는 의회에서 자신들의 원하는 걸 다 얻을 순 없겠지만 최소한 반대파의 목표 달성을 방해할 순 있음을 증명했다. 2023년 미국과 국제사회를 뒤흔들 수 있는 ‘정치적 지뢰’가 등장한 것이란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tzschaeit@gmail.com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