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너와 나의 슬램덩크

김보라 2023. 1. 14.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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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만에 다시 읽는 슬램덩크
농구 신드롬 이끈 만화의 극장판
3040 열광하며 '다시 읽기' 유행
자극적이고 잔인한 콘텐츠 속
순수한 시절 '삶의 철학' 담아
"삶의 영광스러운 순간은 지금"
김보라 문화부 차장

아파트 높이가 지금의 절반도 안 됐던 1990년대 초. 해질녘이면 동네 공터 여기저기서 어김없이 요란한 소리가 났다. ‘탕, 탕, 탕, 타다닥, 쿵.’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그림자가 점점 길어지면 어김없이 우리는 농구공을 들고 문밖으로 나왔다. 누구도 감히 덩크슛을 시도해볼 키는 아니었지만 우리는 뛰고 또 뛰었다. 덩크슛의 느낌이 대체 어떤 건지 궁금해 의자나 친구의 몸을 발판 삼아 가까스로 점프를 하고 골대를 움켜잡은 채 한참을 매달려 있었다. 아스팔트 위 검은 그림자 중 누군가는 강백호가 됐고, 누군가는 채치수가 됐다. 아파트 외벽에 가상의 골대를 그려넣고 지칠 때까지 슛을 하는 날도 많았다. 그렇다. 나도 슬램덩크 세대다.

만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26년 만에 극장판으로 부활했다. 10대 때 공 좀 튕겼던, 이제는 중년의 터널에 진입한 3040들이 극장으로 몰려갔다. 1주일 만에 55만 명이 봤단다. 나도 그랬다. 영화 오프닝과 함께 캐릭터가 하나둘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아…’ 하는 감탄이 저절로 나왔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땐 자리에서 쉽게 일어나지 못한 채 한참을 앉아 있었다. 오랜만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이름 모를 누군가와 같은 시절을 떠올리고 있는 ‘집단 감동’의 순간이.


소셜미디어엔 고이 간직하고 있던 오리지널 만화책 31권의 사진이 간증하듯 올라온다. 수십 번째 완독했다는 이들, 만화 속 캐릭터를 섬세하게 재해석하는 이들, 원작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이들로 넘쳐난다. ‘그깟 만화 보느라 허송세월한다’는 핀잔과 잔소리를 이겨냈던 우리는 세상 어딘가에서 각자 성실하게 드리블을 하다 결국 극장에서 만났다. 코트 위 영웅들과 함께.

슬램덩크는 언더독들이 모인 북산고 농구부의 이야기다. 언더독은 말 그대로 이길 확률이 거의 없는 팀이라는 뜻이다. 스포츠를 다루는 콘텐츠의 서사가 보통은 역경을 딛고 끝끝내 승리하는 영웅담으로 장식되지만, 어른이 돼 다시 읽는 슬램덩크는 그 결이 다르다. 10대 때 봤던 슬램덩크의 관전 포인트는 오로지 승패였다. 도무지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경기에서 북산이 이기느냐 지느냐가 궁금했고, 책장을 재빨리 넘기곤 했다.

40대에 다시 보는 슬램덩크는 우리 인생에 관한 철학적 이야기로 다가온다. 북산고 농구부엔 결점과 트라우마를 가진 선수들로 가득하다. 듬직한 ‘고릴라 주장’ 채치수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스스로를 의심한다. 스스로 ‘농구 천재’라고 말하던 괴짜 강백호는 경기에 나설수록 자신감이 점점 무너지고, 팀의 에이스 서태웅은 외로운 나르시시스트로 그려진다. 무릎 부상으로 방황했던 기억이 트라우마가 된 정대만, 160㎝대 작은 키로 포인트 가드 역할을 해야 하는 노력파 송태섭까지…. 이들은 내면의 결핍으로 각자의 아픔과 상실을 겪는다. 그리고 이들을 강하게 만드는 건 또 다른 결핍을 지닌 동료의 말 한마디, 이들에 대한 굳은 믿음이다. 위기의 순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동료들에게 의지하면서 언더독 북산고는 어느 순간 오버독으로 거듭난다.

누군가의 부모가 되고, 누군가의 리더가 되고, 누군가의 팀원이 된 슬램덩크의 오랜 팬들은 스크린 속에 되살아난 선수들을 보며 나의 이야기이자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슬램덩크는 농구 만화가 아니라 최고의 자기계발서였다’고.

슬램덩크의 부활이 반가운 이유는 또 있다. 돈 때문에 목숨 걸고 싸우고, 이유 없이 남을 괴롭히고, 복수를 위해 칼을 가는 자극적인 영상들 사이에서 어쩌면 가장 순수했던 시절을 가장 박진감 넘치게 그리고 있어서다. 원작자이자 극장판 감독인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원작에서 조연에 불과했던 2학년 송태섭을 극장판의 주인공으로 불러왔다. 결코 평범하지 않았던 그의 가족사를 담담하게 들려준다. 단순히 원작의 동어반복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람들은 농구 천재 강백호, 팀의 에이스 서태웅을 더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송태섭은 그 긴 시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천 번의 드리블을 하고 있었다. 오늘도 코트의 사각지대에 서 있는 우리에게 말한다. 영광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온다고. 그 순간이 지금일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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