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장소가 불러내는 관능적 상상력
신준봉 2023. 1. 14. 00:25
이광호 지음
문학과지성사
“장소들은 사랑의 신체와 같다.” 아리송한 말이다. 이 책의 첫 문장이다.
제쳐 두고 읽어 나가니 이런 문장들이 나온다. “장소가 없다면 사랑은 구체적인 신체의 사건으로 실감되지 않는다 (…) 사랑의 사건은 장소 발생적인 성격을 갖는다.” 아무리 누추한 장소일지라도 연인들의 사랑의 시간을 통해 훗날까지 기억 속에 살아남을 ‘개별성’을 얻게 되니, 연인들이야말로 장소를 발명하는 사람들 아니겠냐는 것이다. 모호하던 책 제목도 비로소 와 닿는다.
저자의 상상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런 문장들이 이어진다. “연인들의 각각의 몸 역시 하나의 장소이다. 연인들의 장소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부드럽고 축축하고 유연하고 날카로운 몸의 사건들이 일어나야 한다.” 관능적인 상상력을 자극한다.
책은 사랑과 장소에 대한 무중력의 사변(思辨)만을 풀어낸 게 아니다. 건더기도 있다. 수많은 텍스트를 거론했다. 소설·에세이·인문서들이다. 이 책들에 나오는 사랑의 장소에 관해 저자가 코멘트하는 형식이다. 가령 영화로도 만들어진 소설 『잉글리시 페이션트』에서 주인공들이 머문 동굴을 두고, 저자는 “동굴의 밤은 지구에서 가장 완벽한 광물학적 어둠”이라고 쓴다. 독특한 산문집이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중앙SUNDAY에서 직접 확인하세요. 해당 언론사로 이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