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은 법조계 진출 준비하는데…베끼고 또 베껴 쓴 아이 [Books]
그러나 따지고 보면 미래의 인류가 상상할 현재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흑백의 인간도 사실은 당대로선 총체적으로 사유하고 부지런히 이동하며 총천연색 생애를 경험했을 것이 자명하다. 무지로부터의 공포를 극복하고자 끊임없이 효율과 합리를 향한 투쟁을 감행했을 것이며, 어둠을 뚫고 시행착오를 반복하려던 저들의 힘으로 인류는 오늘에 이르렀다.
더께 묻은 책으로부터 ‘베스파시아노’라는 이름의 한 피렌체인을 부활시킨 책, 이로써 한 인간의 실천이 오늘날 인류에게 얼마나 경이롭고 찬란한 지식을 전달했는가를 보여주는 지적 모험기가 출간됐다. 신작 ‘피렌체 서점 이야기’의 심연으로 들어가보자.
1430년대 피렌체엔 지식을 실어나르는 작고 좁은 골목이 있었다. 다양한 크기와 품질의 종이(카르타ㆍcarta)를 팔았던 까닭에 ‘카르톨라이오’라고 불렸던 서적상(책장수) 밀집지역이었다. 당시 피렌체 시민의 문해율을 70%로, 유럽 평균(25%)을 크게 앞질렀다.
카르톨라이오는 종이를 파는 지물포 수준을 넘어 주문 받은 필사본을 직접 제작하거나 중고 필사본을 구해주는 출판사 겸 서점 겸 헌책방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렌체 거리에서 영업하던 카르톨라이오 8인은 저자를 포함해 필경사, 세밀화가, 양피지 제조공, 금박공 등과 계약을 맺고 책의 만듦새를 고민했다. 그 무렵 1433년 한 카르톨라이오가 새 조수를 고용했다. 나이는 겨우 11세, 이름은 베스파시아노였다. 이 소년이 훗날 ‘세계 서적상의 왕’이 되리라고는 감히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피렌체 남동쪽 16km 바위투성이 언덕 마을에서 1422년 태어난 베스파시아노는 어린 나이에 양피지와 깃털의 세계에 참여했다. 또래들은 법조계나 종교계 진출을 염두에 두고 라틴 문학을 배우는 문법학교에 입학하거나 피렌체 상인이 되기에 필수적 자질을 키우는 주판학교에 들어갔지만 베스파시아노의 운명은 책이었다. 집안 형편이 기운 탓에 돈부터 벌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비운은 인류로서는 행운이었다.
당시 필사본은 지식을 전하는 거의 유일한 매체였지만 필사본은 사실 문제점 투성이였다. 필경사가 공통적으로 겪는 어려움이란 판독의 어려움과 인간 태생의 오류가 주는 한계였다.
적힌 지 수백 년이 지난 문장들, 그래서 필경사 자신이 알던 것과 너무나 다른 스타일의 필체를 판독해 올곧게 쓰는 일은 매번 인간의 한계를 시험했다. 고서체에선 r과 n, r과 p, n과 p가 잘 구별되지 못해 오타가 많았고 한 문장, 한 문단 전체를 빠뜨리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오죽했으면 한 수도원 필경사 규칙서에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펜을 부러뜨리면 30번 참회하라’, ‘올바른 서체를 구사하지 못하는 필경사에겐 더 나쁜 운명이 기다린다’고 적혀 있을 정도였다.
베스파시아노는 필사본의 오류를 찾아내 바로잡는 귀신 같은 능력을 지닌 소년이었다. 베스파시아노는 처음 카르톨라이오 세계에 들어선지 10년 만에 이탈리아 쟁쟁한 학자를 물리치고 필사본 전문가로 명성을 떨쳤다. 한 수도원장은 베스파시아노가 고작 20대 중반이던 1446년 이렇게 적었다. “우리 베스파시아노는 그런 일(서적 제작)에 최상의 안내자다.” 그 명성은 정말 대단해서, 베스파시아노가 판 필사본 가격이 피렌체 소형 가옥의 1년치 임대료에 육박했다고 전해진다.
사라졌던 그리스 지식이 어두웠던 중세를 지나 르네상스를 꽃 피우게 된 힘도 결국 베스파시아노와 그의 동료 서적상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베스파시아노의 지적 성취는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였는데, 그는 모든 책이 몇 개월간의 수작업으로 만들어지던 시대에 압도적인 지식으로 1000권의 책을 만들어 팔았고 그의 서가엔 플라톤의 ‘파이돈’,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도 있었다.
베스파시아노는 이런 명문장으로 수천 년 남게 될 자신의 이름에 값한다.
“모든 악은 무지(無知)로부터 태어난다.”
한 권의 책을 꿰매기 위한 중세 지식의 여정을 즐겁게 보여준다는 점도 이 책이 가진 또 하나의 한 줄기 광휘다. 베스파시아노와 동시대를 살았던 ‘책 사냥꾼’ 포조 브라촐리니는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장크트갈렌 수도원 도서관 일화를 기억한다. 포조는 벌레가 들끓고 오물과 먼지와 곰팡이로 가득한 수도원 암굴 폐허에서 키케로의 연설문 6편이 담긴 책을 비롯해 로마 시인 발레리우스의 서사시, 비트루비우스의 ‘건축십서’를 발견하고 왈칵 눈물을 흘렸던 강렬한 기억을 가졌다. 수도원장에게 책을 얻어내려고 했지만 실패하자 무려 32일간 암굴에서 전문을 필사했다고 이 책은 전한다.
지금 서적상 거리 베스파시아노의 가게에선 책이 아닌 피자를 판다고 한다. 하지만 베스파시아노 컬렉션은 런던, 파리, 코펜하겐, 빈, 부다페스트, 에스파냐, 바르셀로나, 그리고 미국 하버드 도서관이 소장 중이다.
이 책을 덮을 즈음엔 “네가 태어나기까지는 수천 년이 경과할 수밖에 없었으며 네가 그 판독에 성공할지를 또 다른 수천 년이 침묵하면서 기다리고 있다”(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학문’)이란 오래된 문장을 가슴에 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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