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일기가 아닌 나의 일기를 [삶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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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면 으레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계획을 적을 예쁜 일기장을 산다.
새 일기장이 새로운 계획을 세워오고, 특별한 일기장이 특별한 하루를 가져다줄 것처럼.
그러나 이상하게도 예쁜 일기장일수록 첫 장부터 끝 장까지 채우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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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면 으레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물 마시기, 만보 걷기 등 일상의 소소한 계획부터 10년쯤 걸릴 웅장한 계획까지. 그리고 계획을 적을 예쁜 일기장을 산다. 새 일기장이 새로운 계획을 세워오고, 특별한 일기장이 특별한 하루를 가져다줄 것처럼. 여러 곳의 매장을 둘러보고 가장 마음에 드는 일기장을 얻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예쁜 일기장일수록 첫 장부터 끝 장까지 채우지 못한다. 계획도 예쁘게, 일기도 예쁘게 써야 할 것만 같아 글씨도 또박또박 계획도 고심하여 정성을 들인다. 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마음을 기록하는 일기(日記)는커녕 그날의 비, 구름, 바람 같은 일기(日氣)도 제대로 적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일기장은 자신이 맡은 직책과 임무를 잃는다.
어릴 땐 일기가 숙제여서 싫었고, 학창 시절엔 누가 볼까 쓴 다음 몽땅 태웠다. 한때 친구들과 교환 일기를 여러 권 썼지만 일기라기보단 소설이었다. 매년 예쁜 일기장을 사고 반쯤 텅 빈 채 서가에 꽂아두던 시절을 여러 해 보냈다. 그리고 이제야 진짜 일기를 쓴다. 더는 새해맞이 일기장 사기에 열을 올리지 않고, 예쁜 글씨로 색색의 펜으로 쓰려고 노력하지 않으면서.
나의 일기는 세 가지 이름을 가졌다. 하나는 '오늘의 일기'다. 지나간 일을 기록하는 것이 아닌 오늘 일어나지 않은 일을 기록하는 'to do list' 노트다. 'list'는 일주일과 하루 단위로 적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해야 할 일만 적지 않는다는 것. 계획의 범주에 들어가야 하는 해야 할 일과 범주를 넘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적는다. 하루가 지나면 한 일과 해낸 일은 밑줄을 힘차게 그어 지운다. 어느 날은 모두 밑줄이 그어지기도, 어느 날은 하나만 겨우 그어지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그대로 오늘의 일기가 내일의 일기가 되기도 한다.
두 번째는 읽고 쓰는 일을 위한 '문장일기'다. 읽었던 책 중 기록할 만한 책에 관해 적는다. 책 제목과 저자, 출판사, 기록한 날을 적고, 읽은 책 속 좋은 문장, 의미 있는 문장, 생각할 만한 문장을 적는다. 때때로 문장에서 이어져 나온 생각과 글쓰기 소재, 아이디어도 써 둔다. 처음엔 읽은 모든 책을 기록하려 했다. 그러나 모두 기록하려 하니 아무것도 기록하지 못했다. 때때로 모든 걸 기록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잊는다.
마지막은 아이와 함께하는 '그림일기'다. 난 태교일기도 갓 태어난 아이의 육아일기도 쓰지 못했다. 감동적인 멋진 육아 에세이를 쓰고 싶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아이가 했던 가장 인상적인 오늘의 말과 행동을 적고 그린다. 짧은 두세 문장과 거친 그림이다. 그럼에도 그때의 기분, 표정, 느낌, 상황이 모두 담긴다. 이 일기장을 보면 별것 없이 시시하게 지났던 하루가 무척 아름다운 날이 된다. 마법 같은 일이다.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고 실패하는 것이 아니다. 때론 계획대로 되지 않아 더 멋진 걸 얻기도 한다. 어차피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우린 모두 알지 않던가. 완벽한 인생이란 없으니 완벽한 계획도 필요 없을지 모른다. 더구나 예쁘기만 한 하루는 그 어디에도 없다. 중요한 건 내가 그리고 당신이 변함없이 오늘을 꽉 채워 살아냈다는 것. 일기장에 단 한 줄이라도 쓸 만한 무엇이 있었다는 것.
구선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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