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눈 아닌 초록…우리가 알던 알프스가 사라졌다[유럽, 기후전선을 가다]
바람이 차갑지 않았다. 쾌청한 하늘 아래 따뜻한 볕이 쏟아졌다. 산맥을 이루는 근육질 바위 능선 아래 연두색 풀밭이 펼쳐진 풍경이 제법 멀리까지 보였다. 1월이 아니었다면 그저 아름다운 풍경이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12일(현지시간) 프랑스 남동부 론알프스의 베르코르 지역 자연공원을 찾았다. 지역 자연공원은 한국의 도립공원에 해당한다. 베르코르 자연공원은 연간 3만5000명이 방문하는 프랑스의 대표적 겨울철 스키 여행지로 꼽힌다. 1968년 그르노블 동계올림픽 때 노르딕 스키 경기가 이곳에서 열렸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반나치 레지스탕스의 무대가 될 정도로 넓고 험준한 산 곳곳에 계곡과 동굴, 호수가 형성돼 있으며 랭스 엉 베르코르, 빌라르 드랑스 등 스키장 4개를 갖추고 있다.
그르노블 도심에서 자동차로 40분을 달려 오전 10시쯤 자연공원 입구 관광안내소에 도착했다. 안내소에는 등산객 두어명 뿐, 평소라면 북적거렸을 가족 단위 스키 여행객이나 스키 캠프에 참가하는 학생 단체 손님들은 보이지 않았다. 자연공원의 스키장들은 지난달 17일 문을 열었다가 일주일 만에 순차적으로 다시 닫아야 했다. 날씨가 너무 따뜻해 스키장을 운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달 30일 마지막 슬로프가 운영을 중단했다.오는 18일부터 22일까지 열릴 예정이었던 국제 크로스컨트리 대회도 취소됐다. 자연공원 관광안내소는 “기온이 떨어지면서 지난 9일 눈이 내렸지만 안전하게 스키장을 운영하기에는 충분치 않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스키장은 해발 1400m 지점부터 있다. 정오 무렵 랭스 엉 베르코르 스키장 입구에 도착했다. 이 리조트를 비롯해 자연공원 내 리조트들은 숲 전체가 눈으로 덮여 겨울왕국을 연상케 하는 사진을 홈페이지에 걸어놓는다. 다른 도시에서 온 관광객이 겨울철 베르코르 자연공원 하면 떠올리는 전형적인 이미지이다. 희끗희끗한 눈과 연두색 초목이 공존하는 지금의 풍경은 사진과 거리가 멀었다. 휴대전화 날씨 애플리케이션으로 확인한 기온은 영상 4도였다.
스키장비 대여점에는 직원 외에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날씨 이야기를 꺼내자 직원인 아샤르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눈은 내릴 때도 있고 안 내릴 때도 있어요. 1989년에는 단 3일만 스키장 문을 연 적도 있습니다. 통상 알프스산맥 북사면에 눈이 많이 오면 남사면에는 적게 오고, 남사면에 많이 오면 그 반대입니다. 올해는 남사면에 눈이 많이 왔어요. 문제는 올 겨울 눈이 안 온다는 사실이 아니라 몇년째 극단적이고 이상한 기후가 계속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샤르는 지난 여름 가뭄을 특히 충격적인 경험으로 꼽았다. 지난 여름 유럽은 500년 만의 최악의 가뭄을 겪었다. 프랑스의 원전은 냉각수 부족으로 운영을 중단했고, 독일은 라인 강 수위 저하로 화물선 운송이 일부 중단됐다.
이 무렵 알프스 깊은 산속도 가마솥 더위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아샤르가 전했다. 그는 “해발고도 1400m에서 여름 낮 기온이 영상 40도, 밤 기온이 영상 30도를 기록하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시원한 여름철 기후로 유명한 강원 태백시의 평균 해발고도가 902.2m이다.
그르노블에서 더 멀리 떨어진 알파 뒤 그랑제르 스키장도 사정은 비슷했다. 숙박시설은 텅 비어 있었고 주차장도 한산했다. 기념품 가게는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3시간만 연다고 했다. 이곳에서도 주초에 눈이 내려 설경을 볼 수 있었지만 눈의 질감은 뽀송뽀송하지 않고 끈적했다. 기념품점 직원 마리 노엘 뱅상은 “월요일에 눈이 와서 스키장을 개장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화요일에 비가 오는 바람에 연기됐다”고 말했다.
뱅상은 그르노블 동계올림픽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할 정도로 이곳에서 오래 일했다. 그런 그에게도 최근의 변화는 경험해 본 적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이 리조트는 올 겨울 처음으로 바이크 하이킹 프로그램을 개장했다. 원래 여름철에만 운영하던 프로그램이었다.
해발 2300m 지점에서 폭설이 아닌 폭우가 내리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최근 겪는 현상은 산등성이를 타고 넘어오는 고온의 바람이다. 뱅상은 “스키장을 운영하려면 땅이 얼어서 단단해야 하는데. 산 너머에서 따뜻한 바람이 불어와 눈을 녹여버린다”면서 “이 바람은 스키장 리프트를 뒤흔들 정도로 강풍이라서 밤에 들으면 무서울 정도”라고 말했다.
겨울 이상 고온은 알프스 지역 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관찰되고 있다. 파리의 아파트 단지와 공원에는 꽃이 피기 시작했다. 지역 공영방송 TF3에 따르면 프랑스 동부 프랑슈콩테의 식물원에서는 박하와 바질의 새 순이 돋고 데이지가 피었으며, 라일락과 개나리가 개화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생물다양성의 붕괴로도 이어질 수 있다. 일찍 겨울잠에서 깨어난 동물이나 개화한 식물들은 면역력이 약하고 그만큼 또 다른 이상기후가 닥칠 때 쉽게 죽을 확률이 높다. 과수원의 경우 일찍 깨어난 벌레들에 의해 병충해를 더 빨리 입는다. 프랑스의 농업 기상학자 세르주 자카는 “지금의 겨울 고온은 1세기 동안 벌어진 일 가운데 최악의 일 중 하나”라고 트위터에서 밝혔다.
특히 알프스의 고온은 ‘스키의 죽음’으로 표현된다. 프랑스 파리 고등사범학교(ENS)의 지리학자 마갈리 레게자지트 교수는 이날 워싱턴포스트(WP)에 “앞으로 7∼17년이면 알프스산맥 중턱 높이에서는 스키 타기가 아예 불가능해질 수 있다”면서 “눈으로 덮이는 면적은 알프스 정상에서도 매우 큰 비율로 줄어들 것”이라고 했다. WP는 금세기 말이면 알프스의 눈이 30∼70%까지 감소할 수 있다는 일부 추산치도 전했다. 스키의 죽음은 곧 지역 주민들의 경제적 생계수단과 전통문화, 레저활동을 한꺼번에 잃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르노블 지역 관광업계의 말을 종합하면 아직 경제적 피해는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크지 않다. 스키강사들은 눈이 많이 내리는 다른 지역에 가서 일하고, 휴점한 가게 직원들은 실업급여를 받는다. 브리스 베이라 베르코르 자연공원 관광안내소 공보담당자는 “무엇보다도 지역 관광업계는 4~5년 전부터 스키에 의존하지 않도록 프로그램 다양화에 매진해왔다”고 말했다. 바이크 하이킹, 동굴탐사, 트레킹, 야외요가 등 사계절 내내 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늘려 왔다. 새로 내놓는 프로그램은 최대한 자연과 밀착하는 활동을 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탈탄소를 위해 카풀 서비스 제공도 고려하고 있다.
베이라는 “이 지역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유산 중 하나가 레지스탕스 활동”이라며 “산 주민들도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눈치채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후변화 적응 노력을 레지스탕스 활동에 비유한 것이다.
스키장 운영을 위해 인공강설에 기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인공눈으로 스키장 면적을 덮을 수 없을 뿐더러 가스 가격이 크게 올라 비용 부담도 커졌다. 호수의 물을 끌어다 인공눈을 만들어야 하는 만큼 지역 수자원 낭비 논란도 크다. 베이라는 “변화하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샤르도 “어머니 지구가 변화하는대로 따라가야 한다”고 말했다.
겨울철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는 알프스에서 기후 레지스탕스 활동은 역설적으로 극복보다는 순응에 가까워 보였다.
그르노블 |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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