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당신 누구라고요?”[안주연의 래빗홀]

기자 2023. 1. 13.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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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동네
손보미 지음
문학과지성사 | 314쪽 | 1만4000원

여름날의 강둑. ‘에구구! 너무 늦겠네!’라는 혼잣말과 함께 회중시계를 꺼내 보며 걸음을 재촉하는 토끼를 목격한 소녀 앨리스. 호기심에 사로잡혀 토끼의 뒤를 쫓아 들판을 가로지르고, 망설임 없이 토끼굴로 뛰어듭니다. 낙하 끝에 도착한 지하세계는 먹으면 몸의 크기가 변하는 음식들이 나타나고, 동물들이 말을 하는 신기한 곳입니다. 네,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의 모험이 시작된 것이지요.

어린 시절의 저는 산만하고 운동신경이 없는 아이였습니다. 호기심도, 하고픈 것도 많았지만 그만큼 겁도 많고 내성적이었어요. 세상과 부딪치고 조율하는 일이 엄두가 나지 않았지요. 친구들의 놀이와 말이 거칠다고 느낄 때, 그래서 친구를 사귀기 어려울 때, 선생님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엄마가 나를 걱정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때…. 책은 지루하고 위축되었던 날들의 도피처도 탈출구도 되어주었습니다. 제 앞에 나타난 토끼굴이 바로 책이었어요. 자전거도 못 타고, 목소리도 작은 아이가 큰 세상을 만나고 이해할 수 있는 신비한 통로였습니다.

앨리스는 다른 장소로 갈 때마다, 체셔고양이·모자장수·3월의토끼·쥐·애벌레·거북·정원사 등을 만날 때마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하고, 또 질문을 받습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엉뚱한 문답과 시도를 하며 앨리스는 세상과 자신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열어갑니다. 어쩌면 앨리스가 만난 독특한 캐릭터들은 그의 마음속 다양한 부분들이 아니었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안의 세상을 상상하고 등장인물이나 상황에 자신을 투영하면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내 마음의 어떤 면을 만납니다. 책 읽기는 많이 피곤하거나 우울할 때도 할 수 있는, 능동적인 마음의 모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검은 토끼의 해, 저와 함께 책의 세계라는 ‘래빗홀’을 탐험해보면 어떨까요.

저는 늘 소녀의 성장 이야기에 마음이 끌립니다. 어떤 책을 처음으로 소개해야 할까 열 권 정도를 펼쳐보았지만 결국은 이 책, <작은 동네>입니다. 30대, 간헐적으로 대학 강사로 일하고 번역을 하면서 ‘애매하지만 얼버무리는 태도’로 살아가는 주인공. 남편이 일하는 연예기획사의 송년회에 갔다가 유명 배우인 윤이소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윤이소의 매니저 아내로부터 “그런데, 당신 누구라고요?”라는 질문을 받으며 애매하고 안온한 일상에 균열이 생깁니다.

이후 그의 내면은 작은 동네에서의 폐쇄적인 어린 시절과 현재의 생활을 오가며 어머니와 자신의 삶 이야기를 새롭게 재구성해나갑니다. 남편의 스크랩북, 사라진 배우, 아버지, 어머니와의 병상에서의 대화, 작은 동네, 옆집 개, 숲속의 여자가 등장하는 이 회상 과정이 트라우마 상담과정 같기도 하고, 평행우주의 한 사람의 다양한 생애 같기도 하여 숨을 죽이며 읽었습니다. 애잔하면서도 영민한 주인공의 회상을 따라가면서, 저는 이 어머니와 주인공이 단번에 마음에 들었습니다. 생각이 많고 불안이 높지만 한편으로 유머감각이 있고 표현이 담담한 여성들은 늘 마음을 흔듭니다.

이 집에는 한번 한 이야기나 질문은 설사 만족스러운 답을 얻지 못했다 해도 나중에 다시 말할 수 없다는 이상한 규칙이 작동합니다. 모든 집에는 비밀이 있다고 하는데, 이 집은 근간이 비밀로 이루어진 집입니다. 말해지지 않는 것들이 맥락을 이루고, 하면 안 되고 물어보면 안 되는 것들이 은밀한 규칙을 이룹니다.

어머니와 가족들은 주인공의 삶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합니다. 어린 주인공 또한 안전과 보호를 위해 호기심과 모험, 만남과 갈등을 자제하도록 교육받습니다.

어머니도 주인공도 호기심을 완전히 억누를 수는 없습니다. 호기심은 나를 알게 하고, 나와 세상의 경계선과 한계를 알게 하고, 자연과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고 만나게 하는 힘입니다. 가장 큰 질문이자 가장 큰 호기심인, “그런데, 당신 누구라고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평생을 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모녀는 호기심에 따른 필연적인 사건들을 통해 조금씩 비밀 밖으로 걸어나옵니다. 마지막에 어머니는 비밀 따위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의 삶, 행복, 안전. 자신은 절대 돌려받지 못할 그것을 타인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너는 누구냐’는 질문에 대해 어머니가 찾은 답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마지막 작은 동네. 그녀는 자신의 흔적들을 만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모든 것이 통제되었다고 생각한 작은 동네에서도 그녀는 자라고, 세상을 궁금해하고, 누군가를 만나고 또 자랐습니다.

그녀는 팔과 다리를 힘껏 저어 다시 걷기 시작합니다. 그 한 걸음을 보기 위해, 뭔가 일어날 것처럼 묘하게 불안하고 모호한 이 책을 끝까지 읽어왔다는 느낌입니다. 이 한 걸음을 응원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의 모든 걸음들을 열렬히 응원합니다. 많은 것이 담겨있지만, 온전히 그녀만의 발자국입니다.

안주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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