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유작(遺作)
2008년 개봉 영화 <다크나이트>에 ‘조커’로 나와 소름 돋는 악역 연기를 펼친 히스 레저는 죽기 전 가장 기억에 남는 유작을 남긴 배우로 손꼽힌다. <다크나이트> 출연을 마치고 차기작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을 촬영 중이던 그해 1월, 29세로 세상을 떠난 그는 역대 최고의 악역을 열연했다는 평을 받으며 사후 1년 뒤인 2009년 2월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차기작은 중단 위기에 놓였으나 조니 뎁·주드 로·콜린 패럴 등 당대 스타 배우 3명이 주인공 얼굴이 변해갔다는 설정 변경하에 레저의 역할을 이어받아 ‘4인 1역’ 영화로 그의 마지막 연기를 남겼다.
1973년 사망한 ‘브루스 리’ 이소룡(리샤오룽)의 유작으로 선전된 <사망유희>(1978)는 실패한 유작의 대표 사례다. 그가 생전에 남긴 10여분 분량의 마지막 결투 액션 신을 토대로, 그와 닮은 한국인 배우 김태정을 대역으로 기용해 영화가 완성됐는데 내용과 구성이 엉성해 팬들의 기대에 한참 못 미쳤다. 대역 배우는 주로 뒷모습이거나 멀리서 촬영됐고 얼굴이 클로즈업될 때는 이소룡의 예전 영화 장면이 짜깁기됐다.
지난해 5월 56세로 고인이 된 강수연이 마지막으로 출연한 영화 <정이>가 20일 공개된다. 2011년 임권택 감독의 <달빛 길어올리기> 이후 상업영화에 출연하지 않던 그의 11년 만의 복귀작이자 유작이다. 엊그제 제작보고회에서 강수연이 22세기 전투용병 로봇 정이의 딸이자 인공지능 연구소 팀장 역으로 열연하는 장면이 소개됐다. 한국형 SF물에 관심을 보이며 첫 출연을 해 배우 활동을 재개하려 했던 그의 연기가 마지막이라니 안타깝다. 세상을 떠나기 3주 전까지도 녹음에 참여하면서 컴퓨터 그래픽 영상을 궁금해했다는데, 완성작을 못 보고 떠났다.
유작(遺作)은 죽은 사람이 생전에 남기는 작품으로, 대개 사후에 발표되거나 알려지는 것들을 말한다. 배우뿐 아니라 작가, 음악가 등 예술인들이 죽기 직전에 만들어 남긴 작품을 주로 뜻한다. 조지 오웰의 <1984>, 모차르트의 <레퀴엠> 등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조금 넓혀 생각해보면 누구에게든 유작이 있을 수 있다. 죽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무언가에 열정을 쏟았다면 그게 바로 유작이다. 나는, 우리는 죽어서 무엇을 남길까.
차준철 논설위원 cheo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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