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패권…‘어디 서있는가’에 따라 세상을 달리 본 스승과 제자[윤비의 칼과 펜]
잘 알려져 있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아카데미에서 수학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아테네인이 아니다. 그는 기원전 384년 에게해 북쪽 마케도니아 부근 스타게이라에서 나고 자랐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 문하에 들어간 것은 19세 무렵이었다. 그리고 아테네에서 40년을 머물렀다. 그 40년 동안 오롯이 플라톤의 아카데미에만 적을 두었던 것은 아니다. 기원전 335년 즈음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아카데미에서 독립하여 자신의 학교를 세웠다.
■스승과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두 사제 사이에 대해 사람들은 무수히 입방아를 찧었다. 둘 다 철학사에서 워낙 걸출한 인물인 데다가 제자가 나중에 독립하여 같은 도시에 비슷한 학교를 세웠다는 것이 가뜩이나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놓칠 수 없는 대화거리였을 것이다.
여기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스승을 실명 ‘디스’했다는 사실도 한몫했다. 이런저런 의견의 차이는 둘째치고라도 정치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처자공유제와 재산의 공동소유라는 플라톤의 생각을 대놓고 반박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정치지도자들에게 처자공유나 재산의 공동소유를 제안하였다. 사람들이 자신의 것에 집착하여 다른 사람들과 다툼으로써 폴리스가 분열되는 것을 아예 싹부터 자르려 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제안한 방법이 비현실적이라고 여겼다. 정말 폴리스 안의 어떤 것도 내 것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폴리스에 대한 관심 자체를 꺼버릴 것이라고 그는 예상했다. 정말 처를 공유한다면 분쟁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늘어날 것이다. 지금의 부부들은 서로를 잘 알지만 공유제 안에서는 그렇지 않다. 다툼이나 살인, 갖은 학대 행위가 일어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처를 공유함으로써 태어난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모를 지경이 된다면 동성애가 여전한 아테네 사회에서 부자간에 연인이 되는 따위의 막장 드라마가 펼쳐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재산공유 역시 폴리스의 단결을 가져오기는커녕 부작용만 낳을 가망이 크다. 사람들은 스스로 노동하여 거둔 것에 대해 애착을 가지며 이를 가까운 이들, 가족, 친구들과 함께 누리는 데에서 기쁨을 얻는다.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면 이런 애착과 기쁨이 사라진다. 누군가는 더 노동하고 적게 쓰고 누군가는 덜 노동하고 많이 쓰는 것도 문제다. 차라리 제대로 교육하고 법을 잘 세워 사람들이 지나치게 소유에 탐닉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었다.
이런 비판에 플라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어느 정도라도 신뢰할 만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저런 설들은 어차피 ‘썰’일 뿐이다. 사실 플라톤이 제자의 이런 비판을 제대로 알았는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플라톤은 기원전 348년 언저리에 죽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로부터 30년을 더 살았다. 우리는 언제 그가 플라톤의 이론에 대한 회의를 밖으로 드러내었는지 모른다. 학교도 플라톤이 죽은 후 한참 지난 후에 세웠다. 만일 플라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을 알았다면 기분이 좋았을 것 같지는 않다. 구체적인 반응은 알 수 없다. 스승과 제자가 시쳇말로 ‘계급장 떼고’ 한판 붙는 일은 외국 학계에서도 보기 어렵다. 외국 스승이라고 해서 언제나 이런 ‘도전’을 흔쾌히 받아들일 만큼 너그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두가 왕년 제자 데리다가 자기 좀 들이받았다고 불에 덴 듯 발끈하는 푸코처럼 예민하게 굴지도 않는다.
■친마케도니아파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고향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왕의 제국 건설 과정서
아테네와 테베 잇따라 제압
스승 플라톤과 다른 길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전해오는 이야기 중 정말 중요한 것은 그가 마케도니아와 맺고 있는 관계이다. 태어난 것만 마케도니아 부근이 아니라 그 자신이 아예 친마케도니아파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버지는 마케도니아 필리포스왕의 의사였다고 알려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적어도 잠시나마 필리포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사람이 우리가 잘 아는 알렉산더 대왕이다)을 가르쳤다고 알려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얼마나 마케도니아 궁정과 가까웠는가를 보여주는 것은 그의 유서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사망한 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이 문서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유지가 제대로 집행되도록 도와줄 사람으로서 마치 친구처럼 안티파트로스라는 인물을 추천한다. 안티파트로스는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원정을 떠나며 뒤에 남겨 마케도니아의 통치를 맡길 만큼 중요하고 강력한 인물이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아도 이 철학자가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 필리포스는 물론이고 어머니 올림피아와도 친교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로 보인다. 알렉산드로스가 사망하고 기원전 323년 그리스 곳곳에서 마케도니아의 지배에 반대하는 세력이 들고 일어나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를 떠나 칼키스로 갔다는 사실 역시 그가 친마케도니아파였다는 추정을 뒷받침한다. 아테네를 떠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인들이 ‘또다시’ 철학을 모독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스스로 몸을 피한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아마 그는 스승의 스승뻘인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인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것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아테네인들이 이 말에 동의했을지는 알 수 없다. 아마 이 무렵 이미 그의 학교는 폐쇄되었을 것이다.
■스파르타서 테베로, 테베서 마케도니아로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애뿐만이 아니라 사상을 설명하는 데에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사건인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 정치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흔히 무시하는 사건인 알렉산더 제국의 부상과 몰락에 대해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미 이 연재의 제1회와 18회에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그리스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흔히 승자는 스파르타였다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그리스인의 시각에서 그것도 아주 좁게 사태를 이해했기 때문에 빚어지는 가장 흔한 오해이다. 실제의 승자는 페르시아였다.
페르시아는 자그마치 반세기 동안 스파르타와 아테네 사이에서 줄을 탔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중립으로 보였겠지만 페르시아 입장에서는 이이제이, 강력한 제국이 주변부를 시끄럽게 하는 세력들을 만날 때 가장 흔히 사용하는, 손 안 대고 코 푸는 전략이었다. 전세가 스파르타 쪽으로 유리하게 기울자 동맹을 맺기는 하지만 군대보다는 돈으로 밀어주는 쪽을 택했다. 그나마 스파르타가 너무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지 못하도록 아테네에 슬쩍 힘을 보태는 일도 잊지 않았다. 스파르타나 아테네로서는 분통이 터질 일이었지만 별 뾰족한 수도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전리품을 좀 챙겨보려는 스파르타에 대해 페르시아는 코린토스, 아르고스, 아테네, 테베를 부추겨 반란을 일으켰다. 아테네가 떠난 소아시아의 그리스 국가들을 세력권 안으로 넣어보려는 스파르타의 야무진 꿈은 크니도스 해전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스파르타 해군을 궤멸시킨 아테네와 다른 그리스 폴리스 함대의 뒷배는 페르시아였다. 스파르타는 빠르게 힘을 잃어갔다.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반목이 이어지는 가운데 테베가 등장한다.
펠로피다스와 에파미논다스라는 두 걸출한 인물은 테베를 그리스의 가장 강력한 군사국가로 일으켜세웠다. 기원전 371년 1만명의 중장보병과 1000여 기병으로 이루어진 스파르타군을 맞아 에파미논다스는 레욱트라에서 큰 승리를 거둔다. 에파미논다스는 무적을 자랑하는 스파르타 보병군을 격파하기 위해 사선전술이라는 새로운 전법을 사용한다.
원래 중장보병의 전술은 서로 일자대형을 이룬 후 격돌하여 접전을 벌이는 식이었다. 방패로 밀면서 그 사이로 창을 찔러넣어 서로를 공격한다. 그러다가 한쪽이 밀려 대형이 무너지면 승부가 결정되는 식이었다. <300> 같은 할리우드판 영화나 만화에 나오는 식스팩 남자들의 엄청난 무예 자랑은 그냥 재미로 보면 된다(역사적 사실로 믿으면 정신건강에 해롭다는 뜻이다). 에파미논다스는 전술을 바꾸어 대형의 좌익에 군의 주력을 집중배치한 후 맞은편 스파르타군의 대형으로 빠르게 돌격했다. 자연히 나란히 진군하는 것이 아니라 왼쪽이 앞으로 나오고 오른쪽은 뒤에 처지는 사선 모양의 대형이 만들어졌다.
스파르타군으로서는 마치 적의 좌익이 툭 튀어나와 공격해오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스파르타군이 이를 눈뜨고 보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스파르타군은 상대적으로 엷어진 테베군의 우익을 감아돌아 포위하려 했다. 수적으로 유리한 스파르타군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게다가 스파르타군의 우익 역시 강력했다. 지휘부도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승리는 곧 판가름났다. 스파르타 왕 클레옴브로투스를 비롯하여 적잖은 지휘관들이 사망했으며 스파르타의 자존심인 중장보병부대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테베의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다. 북쪽에서 일어난 마케도니아가 세력을 급속히 확장하며 중부 그리스로 남하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원래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세계에서 변방 취급받는 이등국가였다. 사태는 필리포스가 왕위에 오른 기원전 359년을 기점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군사제도를 개혁하여 엘리트 군대를 양성하였으며 사리사라고 불리는 긴 창을 무기로 보다 두껍게 대형을 형성하는 새로운 보병전술을 개발하였다. 여기에 마케도니아가 전통적으로 강점을 갖고 있던 기마군을 보다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공격력과 방어력을 극대화시켰다.
최초 마케도니아를 손쉽게 다룰 수 있는 후진세력쯤으로 여기던 테베와 아테네로서는 마케도니아의 빠른 세력 확장을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기원전 338년 마침내 카이로이네아에서 양측은 각 3만여명을 동원한 결전을 벌였다. 전투의 결과는 아테네와 테베의 패배였다. 이제 그리스에서 마케도니아에 맞설 세력은 없었다.
마케도니아의 힘은 필리포스가 암살되고 알렉산드로스가 왕위에 오르면서 약화되기는커녕 더 세졌다. 알렉산드로스는 반란을 일으킨 테베를 아예 지도상에서 지워버렸다. 마찬가지로 반기를 든 아테네에는 훨씬 관대한 처분을 내렸는데, 어쩌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여기서 일정한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마케도니아의 세상이 열렸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 왕실과 가까운 인물이었다. 이런 인물이 연 학교가 인기가 없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강한 나라 건설 주장한 플라톤은
아테네 시민의 절박함 보여줘
아리스토텔레스는 ‘대제국’ 염두
국가관 등 달랐던 두 철학자
전쟁 결과 달랐더라면 어땠을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이론을 읽으면서 우리는 플라톤과 뚜렷이 다른 점을 느낀다. 이전에도 이야기했듯이 플라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나고 내우외환이 이어지던 아테네의 꽤 사는 집안 엘리트였다. 그의 주장에서 강한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절박감 비슷한 것이 느껴지는 것, 때로 그의 주장이 여기저기서 상당히 극단적으로 나아가는 것은 이런 배경과 관련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철학은 보편을 지향했지만 그 자신은 아테네 시민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서 우리는 그런 절박함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에는 플라톤이 중요하게 여긴 국가의 방위와 관련된 주제들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마치 대학교 강의실에서 교수가 학생들에게 강의하듯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딱히 아테네나 다른 특정 도시를 염두에 두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리지도 않는다. 이런 차이는 개인의 성향이나 생각 탓도 있겠지만 앞서 말했듯 플라톤과 다르게 아리스토텔레스가 처한 입장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중해와 아시아를 통일한 대제국의 시민으로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제국 안에 있는 모든 정치제도와 문화를 아우를 보편이론을 꿈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디에 서 있는가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보인다.
글은 다음으로 이어진다.
▶윤비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정치이론을 역사 및 문화와 관련지어 연구한다. 베를린 훔볼트대 정치학과 및 역사학과, 서울대 외교학과에서 서양정치사상을 강의하였다. 가르친다는 일을 영광으로 여기며 산다. 2021년 마키아벨리를 주제로 독일에서 단행본을 출간하였다. 2018~2020년 한겨레 신문에 ‘윤비의 이미지에 숨은 정치’를 연재하였고, EBS <지식의 기쁨> <세바시> 등에서 강연하였다.
윤비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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