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설렘’ 화순 기행

박찬은 2023. 1. 13.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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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독이는 침묵의 땅
겨울은 깊고 산천은 얼어붙었다. 수목은 빛이 바랬지만 흙과 돌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무등산의 고고한 자태가 흐트러짐 없이 흘러내린 땅 화순의 자연도 그랬다. 순수 자연의 땅, 묵화처럼 깊고 은은한 멋의 고장 화순으로 간다. 천불천탑 신비의 도량 운주사와 천상의 비경 화순적벽이 그곳에 있다.

수묵화처럼 깊고 은은한 멋의 고장 화순

연이틀 눈이 내렸다. 세상은 잠시 밝고 온화한 풍경으로 바뀌었지만 겨울은 더욱 깊고 무겁게 다가선다. 쉬이 웅크리게 되는 계절이다. 그럴 때 여행을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누구에게나 그저 추위를 피해 머물 수 있는, 온기 가득한 안식처만이 필요할 뿐이다. 다만 혹한의 계절, 혹독한 추위라고 해도 ‘때’라는 건 있기 마련이다. 지난 한 해를 정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해야 하는 바로 이 시점에서는 뭔가 ‘계기’를 만들고 싶은 욕망이 가슴 한 편에서 스멀스멀 솟구치기도 한다. 그럴 때 오랫동안 로망해온 ‘나만의’ 여행지나 남다른 의미를 부여한 특별한 여행지에 꽂히기도 한다.
화순 운주사 가는 길

내게는 전라남도 화순이 그런 곳이다. 흙과 돌, 물과 바람이 빚어낸 순수 자연의 땅, 수묵화처럼 깊고 은은한 멋의 고장 화순은 언젠가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여행지였다. 그게 언제일까, 언제쯤이 좋을까, 여행 시기를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적잖은 시간을 흘려 보냈다. 그런 화순을 목적지로 삼게 된 건 뜻밖에도 수도권에 갑자기 내린 눈 때문이었다. ‘온화하고 순하다’는 이름과는 다르게 무거운 ‘침묵’의 땅으로 기억되는 화순은 왠지 겨울이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해왔던 것 같다. 분주하지도, 번잡스럽지도 않게 오로지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 한 해를 돌아보며 무언가를 정리하기에 이만한 여행지는 없다는 생각을 하며 화순의 겨울 속으로 들어갔다.


미완의 꿈, 현재진행형의 염원 운주사

무등산 줄기의 끝자락, 천불산 골짜기에 자리한 운주사는 ‘천불천탑’으로 세상에 알려진 사찰이다.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의 배경지로도 유명한 바로 그 절이다. 해발 100여m의 야트막한 야산, 남북으로 뻗은 두 산등성이 사이 계곡에 자리 잡고 있는 운주사는 소박하다. 아니 소박함을 넘어 투박할 만큼 제멋대로 만들어진 듯한 사찰이다. 일체의 격식을 배제한 듯한 자유분방한 모습, 그러나 시선을 조금만 달리하면 파격도 이런 파격이 없다. 시작과 끝을 구분하기 어렵게 골짜기를 따라 길게 늘어진 도량의 생김이 그렇고, 천왕문과 사천왕상도 없다. 불상이나 석탑의 형태 또한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양 일색이다. 기존 사찰들의 정형을 깨는 파격, 불가사의로 여겨질 만큼 신비로운 모습들이다. 도대체, 왜, 누가 이렇듯 낯선 도량을 만들었을까. 설화나 전설이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미스터리’. 운주사의 첫 인상은 대개 그런 모습이다.
운주사 대웅전

‘미스터리’한 사찰의 시작은 일주문을 지나 만나게 되는 석탑과 불상들이다. 첫눈에 들어오는 9층석탑(보물 제796호)부터 그 낯섦과 신비로움이 예사롭지가 않다. 거대한 암반 위에 세워진 석탑은 탑신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져 있다. 바로 뒤에 보이는 7층석탑도 매한가지다. 대웅전 방향 전각으로 가기 전에 만나는 석조불감(보물 제797호)은 파격의 끝판왕이다. 국내 어느 사찰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 불감은 돌로 만든 팔작지붕 형태로 두 분의 부처님이 등을 맞대고 앉아 있는 특이한 형태이다. 그리고 그 뒤, 마치 둥근 도넛이나 호떡을 포개놓은 것 같은 이색적인 생김의 탑은 이게 과연 불탑이 맞나, 하는 의문을 던져준다. 지대석 기단부터 탑신부의 탑신과 옥개석까지 모두 원형을 이루고 있는 탑이다. 연화탑이라고도 불리는 원형다층석탑(보물 제798호)으로 떡시루를 쌓아놓은 것 같은 원구형석탑과 함께 파격적인 운주사 석탑의 전형을 보여준다.

운주사의 석불들은 더욱 경이롭고 기이하다. 기존에 알던 단아한 불상들과는 사뭇 다른, 투박하고 단조로운 모습의 특이하고도 특별한 조형물들이다. 얼핏 보면 마치 외계 생명체의 모습처럼 생경하다. 납작한 돌에 새긴 홀쭉한 얼굴, 그 위에 선으로만 그린 눈과 코, 입 모양이 서툴고 엉성하기 짝이 없다. 할아버지 부처, 할머니 부처, 남편 부처, 아내 부처, 아기 부처 등 이름도 소박하다. 그렇게 소박하고 투박하지만 운주사의 석불들은 마치 가까운 이웃처럼 인간적이다. 누구나 편하게 만나고 합장으로 마주할 수 있는 부처, 그런 불상이 천불산 골짜기 곳곳에 홀로 혹은 무리를 지어 서 있다. 제각각 다른 모습으로 다른 위치에 서 있는 불상은 무질서해 보이기도 하지만 하나하나 그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신령스러운 사찰 운주사의 아우라가 더욱 빛난다.

대웅전 뒤 산 중턱에 있는 불사바위에 오르면 운주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S’자로 굽이쳐 흘러내리는 계곡에는 현재 80여 기의 석불과 21기의 석탑, 173기의 유물이 있다. 도량의 끝이 어디인지 분명히 구분할 수 없지만 곳곳에 서 있는 불탑과 불상의 존재가 운주사의 규모를 가늠케 해준다. 불사바위는 운주사의 석탑과 불상의 탄생 설화가 깃든 곳이다. 운주사 천불천탑을 불사할 때 도선 국사가 골짜기를 내려다보며 지시했다는 바위다.

천불천탑의 전설은 드라마틱하다. 운주사에 천불천탑을 세우면 국운이 열릴 것으로 생각한 도선 국사가 하늘나라 석공들을 데려와 하룻밤 사이 석탑 1000기와 석불 1000좌를 세우기로 했는데, 동자승이 장난삼아 닭 울음소리를 내는 바람에 날이 밝은 것으로 안 석공들이 모두 하늘로 올라가 석불 2좌는 마저 세우지 못했다는 스토리다. 그때 미처 세우지 못한 두 개의 석불이 서쪽 산비탈에 있는 와불(와형석조여래불)로 국내 와불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안타까운 이야기를 뒤로 하고 솔숲에 사이좋게 누워 있는 남편불과 아내불은 미완의 도량으로서 세상에 영원한 화두를 던진다. 이 와불이 일어서는 날,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것이다.


천상의 풍경, 화순 적벽

누군가 화순을 버킷리스트에 담아 놓았다면 십중팔구 적벽에 매료됐을 가능성이 크다. 화순적벽의 이미지는 강렬하다. 화순 제일의 비경으로 꼽히는 게 우연은 아닐 터. 압도적 아름다움과 풍취를 자랑하는 화순절벽은 과연 죽기 전에 꼭 한 번 가봐야 할 인생 여행지로 꼽을 만하다. 나 역시 마음에 담아온 화순의 이미지는 바로 적벽이었다. 언젠가 꼭 한 번 그 웅혼하고도 청청한 자태를 보고야 말겠다는 다짐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 화순 여행의 백미 역시 마침내 화순적벽을 대면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화순적벽

화순적벽은 동복천 상류 창랑천에 약 7㎞에 걸쳐 형성된 4개의 적벽을 말한다. 노루목적벽(장항적벽)과 물염적벽, 보산적벽, 창랑적벽이 그것이다. 국가 명승 제112호로 지정된 화순적벽은 1519년 기묘사화 후 화순에 유배 중이던 신재 최산두가 동복호 푸른 물에 비친 절벽의 수려함이 북송 최고의 시인 소동파가 노닐던 중국 적벽에 버금간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신의 솜씨로 깎아놓은 듯 신비하면서도 웅장한 절벽과 그 절벽을 감싸고 도는 그윽한 동복호의 푸른 물빛은 무릉도원을 떠올리게 할 만큼 아름답다. 하여 그 아름다움은 호남문학의 산실로도 이어진다. 천하를 떠돌던 ‘김삿갓’ 김병연의 방랑을 멈추게 한 것도 화순적벽의 아름다움이었다. 적벽에 반해 화순을 세 번이나 찾았던 김병연은 여러 편의 시를 남겼고 결국 그가 사랑한 땅에서 눈을 감았다. 또 석천 임억령은 신선의 세계와 같다는 뜻으로 적벽에 ‘동천’을 붙여 ‘적벽동천’이라 부르기도 했다.

화순적벽의 최고 절경으로 장항리의 노루목적벽을 꼽는다. 최고 높이가 80여 m로 적벽 중에서도 가장 웅장하고 화려한 자태이다. 노루목적벽은 과거 추석 연휴 때 성묘객을 위해 잠시 개방하던 곳이었는데 지난 2015년 30년 만에 일반인에게 개방했다. 노루목적벽을 보기 위해선 구불구불한 임도를 따라 4.5km나 가야 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적벽의 장관은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특히 붉은 절벽이 단풍과 어우러지는 가을과 노을로 물드는 저녁 무렵이면 인생에 남을 만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적벽이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곳에는 망미정과 망향정, 보안사지 석탑이 서 있다. 보산적벽은 노루목적벽에서 서쪽으로 약 600m 거리에 있는 보산리 북쪽에 형성되어 있다. 규모는 작으나 노루목적벽과 동복호의 풍광과 어우러져 빼어난 절경을 만들어낸다.
노루목적벽

김삿갓의 발목을 붙잡았다는 물염적벽은 건너편 언덕 위에 있는 정자 물염정과 산수화처럼 어우러진다. 물염정에서는 휘돌아가는 강물과 빼어난 산세를 조망할 수 있다. 창랑리에 있는 창랑적벽은 약 40m 높이에 길이가 100m가량 이어진 절벽군으로 그 자태가 웅장하다. 화순적벽은 아무 때나 가서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다. 물염적벽과 창랑적벽은 언제든 자유롭게 방문이 가능하지만 노루목적벽과 보산적벽을 보려면 정해진 시간에 몇 차례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2023년 상시개방 계획이 세워짐에 따라 좀 더 자유로운 탐방이 가능할 것으로 보이지만 개방 시기와 탐방 방법은 달라질 수 있으니 사전에 확인하고 방문할 필요가 있다.

세상을 사로잡은 단 한 장면, 세량지

화순에 온 김에 가봐야 할 곳이 있다. 봄날의 풍경이 가장 아름답고 그 또한 새벽의 정취가 그만이라는 세량지다. ‘세량제’라고도 하는 이곳은 CNN이 선정한 ‘한국에서 꼭 가봐야 할 50곳’에 이름을 올린 ‘풍경 맛집’이다. 지금은 봄도 아니고, 물안개가 피어 오르는 새벽도 아니지만 그 황홀한 풍경이야 어디 가겠는가.

세량지는 아주 작은 저수지다. 인근 새암골의 물줄기가 졸졸 흘러내려 호수가 된 곳. 호숫가에 서 있는 뾰족한 삼나무가 잔잔한 물 위에 투영된 풍경이 북유럽의 어느 호숫가에 와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특히 호수 둘레를 감싼 산벚꽃이 만개하는 봄날, 호수에 비친 꽃이 수면 위로 솟아오르는 풍경은 눈을 의심하게 만들 만큼 경이롭다. 반쯤 얼음으로 덮인 호수는 아름다운 주변 풍광을 온몸으로 담지 못한 채 고적한 모습이다.
info 세량지 전남 화순군 화순읍 세량리 100
세량지 둘레길

모아이 석상을 볼 수 있다고? 세계거석테마파크

지난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은 화순 고인돌유적지의 고인돌공원 옆에는 신박하고도 흥미로운 테마파크가 있다. 바로 세계의 유명 거석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은 세계거석테마파크다. 이곳에는 그 유명한 모아이 석상과 세네감비아의 환상열석도 있다. 그뿐 아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콜롬비아의 산 아구스틴 돌멘과 그 유명한 스톤헨지도 만나볼 수 있다. 물론 원형과 가장 비슷하게 재현한 조형물이고 사진으로 대신하는 것도 있다. 하지만 세계 각국의 상징과도 같은 거석을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건 흥미롭다.

테마파크의 핵심인 세계 7개국 거석 조형물 가운데 콜롬비아의 산아쿠스틴 돌멘과 북한 관산리 고인돌, 중국의 석봉, 인도의 우산돌, 아프리카의 환상열석 등 유명 거석은 원형과 같은 크기, 유사한 석재를 사용해 제작했고, 칠레 이스터섬의 모아이 석상과 프랑스 로체 돌멘은 원형을 축소시켜 제작하였다. 또 사부섬 고인돌과 라테 스톤, 스톤헨지 등은 안내석을 만들어 소개하고 있다. 원형을 재현한 모형들이지만 뜻밖의 즐거움이다. 바로 옆에 있는 고인돌 선사체험장과 고인돌 오토캠핑장과 연계해서 즐겨도 좋을 곳이다.
Info

세계거석테마파크 전남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 177

[글과 사진 이상호(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63호 (23.01.17)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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